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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 백호1
시대 1800
초록 호랑이는 고대에는 아주 보편적이었고 지금도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호(虎)는 호랑이의 줄무늬를 상징하는 어근  와, 그 아래에 짐승이 인간처럼 똑바로 선 다리를 뒤에 세운 것을 암시하는  로 이루어져 있다. 중국에서 호랑이는 맹수의 왕으로 불렸고, 그것의 실제나 혹은 상상적인 특징으로 인해 다른 난폭한 동물보다 많이 비유되었다. 호랑이는 군사적인 용기를 상징한다. 그래서 중국의 군사들은 때때로 호랑이 가죽이나 꼬리등을 본따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전투에서 마치 호랑이가 실제로 으르렁거리듯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아갔는데, 그들은 이 함성이 적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위엄과 사나움의 상징으로, 병사의 특징인 맹렬과 용기에 대한 모델로 취급되었고 그 존재와 으르렁거림은 위험이나 공포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 호랑이는 작품속에서 2가지 유형으로 등장하는데, 십이지(十二支)중의 호랑이와 사신(四神)중의 백호(白虎)로 크게 구분된다. 사신은 4개의 신으로 이것은 동서남북 사방의 신을 상징한다. 전설의 황제(黃帝)는 제후를 관도(官途)에 봉할 때, 사방을 상징했던 사(祠)의 색토(色土)를 부여하였다.(『史記』) 즉 동방에 부임하는 사람에게는 청토를 주고, 서방의 사람에게는 백토를 남방의 사람에게는 주토를 그리고 북방의 사람에게는 흑토를 주어, 황토를 중심으로 한 국가의 유기적인 관계를 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상태는 그대로, 중앙을 중심으로 했던 세계관으로 확립되게 된다. 『예기』에도 사령(四靈)을 들어서 동은 푸른 용형의 형태를 따서 칠성(七星)의 숙(宿)을 정하고, 서는 흰 호랑이의 형태를 따서, 남은 붉은 주작형에서, 북은 검은 현무의 형태에서 모방하였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옛날에는 기린, 봉황, 거북, 용이 사령이었지만, 점점 시대가 흐르면서 전술한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바뀌게 된다. 즉 동서남북의 상징이 변하여, 기린이 호랑이로 교체되고 거북이 현무로 바뀌었으며, 봉황이 붉은 작(雀)로 바뀌어 온 것이다. 기린이 호랑이로 대체된 것은 殷중기전후부터였는데, 도철의 호랑이가 사실적 실감과 힘의 지도성을 가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상상으로 구성된 기린에 비해 호랑이는 객관적 현실적인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강한 매력이 있었을 것이다. 요약하면 호랑이는 실재하는 동물(動物)로 그 용감함과 용맹스러움이 모든 동물의 왕자(王者)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출처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正祖健陵山陵都監儀軌)
자료명 백호2
시대 조선시대
초록 백호기는 대오방기의 하나로, 군영의 오른편 문에 세워서 우군 혹은 좌군을 지휘하였다. 흰 사각 바탕에 적색 날개를 달았고, 날으는 백호와 청,적,황,백 사색의 운기를 그리고 화염각은 노란빛으로 했다. 깃대의 길이는 열다섯 자이였고, 대가와 법가 등에 사용되었다. 백호(白虎)는 서쪽을 맡은 수호신으로 머리에 용처럼 쌍각이 없고 몸에 비늘이 없는 대신 몸에 호반(虎斑: 호랑이 무늬)이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시작된 사신도의 백호는 실존의 동물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동물이다. 백호는 산신각의 문, 사찰의 벽, 산신도 등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로써 여타의 다른 호랑이 보다 백호는 신성시되었다. 특히 백호도에는 반드시 귀치가 그려지는데 송곳니가 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더러는 네 개의 귀치가 그려진 경우도 있다. 이 경우는 아마도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계에 실재하는 호랑이를 영물시하면서 등장한 신수이다. 백호는 가을을 상징하는 동물이기도 하다. 초기에는 머리와 세부가 호랑이와 같으나 목과 몸통 꼬리가 가늘고 긴 파충류같이 그려졌다.
출처 조선왕실유물도록
자료명 보도
시대 1897이전
초록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국사(國事)에 사용하던 도장이다. 명칭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人)'으로 인면(印面)에 새겨져 있으며, 재질은 은으로 만들고 그 위에 도금을 베풀었다('天銀鍍金'). 인장의 꼭지에 있는 영물(靈物)은 거북의 몸에 용의 머리가 조합된 것이다. 여러 문서에 사용되었으며, 대내(大內)에 봉안하였다. 보인의 보(寶)는 국왕의 옥새(玉璽)를, 인(印)은 일반적인 도장을 의미한다. 어보(御寶)는 국새(國璽)·어새(御璽)·옥새(玉璽)·국보(國寶)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쓰였으며, 일반적으로 임금의 인장을 칭하지만 왕비, 왕세자, 빈 등의 인장도 포함된다. 재질상 옥으로 만든 것은 옥새, 금으로 만든 것은 금보(金寶)로 나뉘며, 문서의 내용에 따라 각각 다른 옥새가 사용되었다. 문헌상으로 옥새에 관한 얘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후한서(後漢書)』와 『사기(史記)』로, 진시황이 화씨벽(초나라 화씨가 봉황새가 깃든 돌에서 캐낸 옥)을 입수해 그것으로 도장을 만든데서 유래한다고 한다(도장을 만든 재질이 옥이었기 때문에 임금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시황은 승상 이사를 시켜 이 도장에 '수명어천기수영창(受命於天其壽永昌: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라는 의미)'이라는 글을 새겼다. 그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서자 진시황의 손자인 자영은 옥새를 한 고조 유방에게 바쳤고 한 고조가 이 옥새를 차고 다니자 이를 '전국의 옥새'라고 불렀으며, 이때부터 옥새는 황제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왕(穢王)이 '예왕지인(穢王之印)'을 사용한 것이 시초이며, 고려때는 요·금 등이 왕에게 금인(金印)을 하사하고, 원에서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부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의 도장을 보내왔으며, 명에서는 1370년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보내왔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성립한 조선왕조는 명나라에 옥새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는데, 옥새를 하사받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으로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옥새는 중국으로부터 하사받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당시 옥새의 영물(靈物)은 거북이로, 이것은 중국이 변방의 제후들에게 내리던 상징물이었다. 조선왕조는 중국에서 하사한 옥새는 중국과의 외교문서등에 사용하였고 국내문서에 사용하던 것은 자체 제작하였는데, 이 자체 제작한 옥새에 들어있는 거북이의 모양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출처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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