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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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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명 |
미선 |
| 시대 |
1829 |
| 초록 |
순조기축진찬의궤는 1829년(순조29년) 순조가 40세가 되는 동시에 재위 3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잔치를 행한 일에 대한 종합보고서이다. 권수(卷首)의 「도식」은 행사장의 인원과 그 위치를 문자를 써서 표 형식으로 제시한 반차도, 행사장과 행사광경을 그린 그림, 개별 의식과 악기·소품 등을 구체적으로 밝힌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용도(器用圖)에는 진찬때 사용하였던 의자, 상, 촛대, 술병, 술잔 등을 그린 그림을 담고 있다. |
| 출처 |
순조기축진찬의궤(純朝己丑進饌儀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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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명 |
미후 |
| 시대 |
1743 |
| 초록 |
대사례란 임금이 성균관에 나아가 석전례(釋奠禮)를 지낸 뒤 신하들과 활쏘기를 행하는 의식이다. 지방관이 행하는 향사례(鄕射禮)와 함께 중국에서 주대(周代)에 크게 성행한 전통적인 천자(天子)의 의식이다. 활쏘기의 개념은 신체를 단련시킨다는 의미보다 마음을 닦는 수단으로 제사 의식과 관련이 있었다. 대사례는 단순히 선비가 갖추어야 하는 육례(六禮)의 하나인 활쏘기의 기량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드러나는 사자(射者)의 덕(德)을 보는 데 의미를 두었던 것이다. 왕의 표적이 웅후(熊侯)인 것에 반해, 미후는 신하들의 표적으로 푸른색 베로 감쌌다. 신분 질서를 중시한 유교 예법에서는 활쏘기의 표적도 신분에 따라 서로 달랐다. 주나라의 유교 예법에 따르면 천자의 표적은 호랑이 머리를 그린 호후(虎侯), 제후는 웅후, 경대부(卿大夫) 이하는 미후였다. 왕이 화살을 다 쏘고 물러나면 수행한 신하들이 짝을 지어 활쏘는 자리로 올라가 4발의 화살을 쏘았다. 활을 다 쏜 후에 신하들은 왕을 향해 절을 하고 내려왔다. 신하가 쏜 화살이 과녁을 맞추면 북을 쳤고, 맞추지 못하면 징을 울렸는데, 활쏘기가 끝나면 왕은 성적에 따라 상이나 벌을 주었다. |
| 출처 |
대사례의궤(大射禮儀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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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명 |
반차도1 |
| 시대 |
1759 |
| 초록 |
1759년(英祖 35) 6월에 영조가 계비(貞純王后)를 맞아들이는 의식의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권말(卷末)에 그려진 반차도는 별궁(別宮)에서 친영의(親迎儀)를 마친 영조가 친히 정순왕후를 대궐로 모셔오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반차도는 크게 두부분으로 구성되어, 반차도의 앞부분에는 왕의 행차가 뒷부분에는 왕비의 행차가 그려져 있다. 왕의 연(輦)은 부연(副輦)의 뒤에 있으며, 왕비의 연 앞에는 왕비의 책봉과 관계된 교명(敎命)·옥책(玉冊)·금보(金寶)를 실은 교명요여, 옥책요여, 금보요여가, 명복채여가 그려져 있다. 왕의 연은 사방을 열어 놓아 내부를 볼 수 있게 하였으며, 왕비의 연은 내부를 볼 수 없게 하였다.
반차도에서 인물과 함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바로 이 가마이다. 왕과 왕비의 가마인 연은 밑에 수레를 달아 말이 끄는 것으로 주로 궁궐 밖의 행차에 사용되었으며, 여는 사람이 어깨에 메고 다닌 것으로 궁궐 밖의 행차에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의 연은 옥개(屋蓋)에 붉은 칠을 하고 주홍과 황금으로 장식했으며, 둥근 기둥 네 개로 작은 집을 지어 위에 올려놓고 사방에 붉은 난간을 달아 겉에는 운룡(雲龍)을 그렸으며, 안에는 운봉(雲鳳)을 그렸다. 또한 처마에도 여러 가지 조각으로 장식했으며 소련,대련,평련 등이 있었다. 오례의(五禮儀)에 따르면 대련은 붉은 바탕에 주홍으로 칠을 하고, 그림은 황금을, 장식은 감금철(甘金鐵)을 쓰고 좌우에는 길다란 들채가 있는데, 양끝에는 도금한 용두(龍頭)를 만들어 덮어 씌웠다고 한다. 왕비의 대련은 적색 바탕에 주홍색 칠을 하고, 그림은 황금을 쓰고, 장식은 사금철(絲金鐵)을 사용한다. 좌우에는 길다란 들채가 있고, 양끝에는 도금한 용두(龍頭)를 만들어 덮어 씌운다고 하였다. |
| 출처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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