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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 황태자보
시대 1897
초록 1897년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출범으로 고종이 황제를 칭하게 되자 황제의 도장인 보인(寶印)도 이에 맞게 격이 조정될 필요가 있었다. 기존의 보인 위에 조각되는 영물(靈物)은 거북이로, 이것은 중국이 변방의 제후들에게 내리던 상징물이었다. 거북이의 모양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중국의 세력이 약화되고 조선왕조가 주체성을 강조하는 시대일수록 거북이의 머리가 올라갔다.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은 "(옥새의) 거북이만 보면 신물난다"고 하며 이전의 것을 전부 폐지하고 상징물을 용으로 바꿔 도장을 만들었다. 이 도장은 황태자의 것으로 재질은 황금으로 만들었다. 인장의 꼭지에 있는 영물은 황제를 상징하는 용이다.
출처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
자료명 황태자보도
시대 1897이전
초록 황태자(皇太子)가가 사용하던 도장이다. 명칭은 '황태자보'으로 인면(印面)에 새겨져 있으며, 재질은 순금도금이다.('純金鍍金'). 인장의 꼭지에 있는 영물(靈物)은 용의 형상이다. 보인의 보(寶)는 국왕의 옥새(玉璽)를, 인(印)은 일반적인 도장을 의미한다. 어보(御寶)는 국새(國璽)·어새(御璽)·옥새(玉璽)·국보(國寶)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쓰였으며, 일반적으로 임금의 인장을 칭하지만 왕비, 왕세자, 빈 등의 인장도 포함된다. 재질상 옥으로 만든 것은 옥새, 금으로 만든 것은 금보(金寶)로 나뉘며, 문서의 내용에 따라 각각 다른 옥새가 사용되었다. 문헌상으로 옥새에 관한 얘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후한서(後漢書)』와 『사기(史記)』로, 진시황이 화씨벽(초나라 화씨가 봉황새가 깃든 돌에서 캐낸 옥)을 입수해 그것으로 도장을 만든데서 유래한다고 한다(도장을 만든 재질이 옥이었기 때문에 임금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시황은 승상 이사를 시켜 이 도장에 '수명어천기수영창(受命於天其壽永昌: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라는 의미)'이라는 글을 새겼다. 그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서자 진시황의 손자인 자영은 옥새를 한 고조 유방에게 바쳤고 한 고조가 이 옥새를 차고 다니자 이를 '전국의 옥새'라고 불렀으며, 이때부터 옥새는 황제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왕(穢王)이 '예왕지인(穢王之印)'을 사용한 것이 시초이며, 고려때는 요·금 등이 왕에게 금인(金印)을 하사하고, 원에서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부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의 도장을 보내왔으며, 명에서는 1370년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보내왔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성립한 조선왕조는 명나라에 옥새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는데, 옥새를 하사받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으로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옥새는 중국으로부터 하사받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당시 옥새의 영물(靈物)은 거북이로, 이것은 중국이 변방의 제후들에게 내리던 상징물이었다. 조선왕조는 중국에서 하사한 옥새는 중국과의 외교문서등에 사용하였고 국내문서에 사용하던 것은 자체 제작하였는데, 이 자체 제작한 옥새에 들어있는 거북이의 모양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중국의 세력이 약화되고 조선왕조가 주체성을 강조하는 시대일수록 거북이의 머리가 올라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조때는 많은 종류의 옥새를
출처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자료명 계력도1
시대 20세기초기
초록 민화의 소재들은 순수감상을 위한 것들도 있지만, 그 이외에 기복축사(祈福逐邪), 벽사진경, 권선징악(勸善懲惡)과 같은 기원이나 소망, 그리고 민간신앙이나 종교적인 측면을 강하게 띠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또한 문자도의 여덟 글자를 보면 일상생활의 도덕이나 윤리규범이 담겨있고, 책거리 그림에는 학문 존중의 뜻도 내포되어 있다. 특히 문자도는 당시 서민대중을 유교적 도덕관으로 교화시키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값싼 가격으로 다량 보급 가능했던 문자도는 서민사회를 유교적 도덕이나 윤리속에 질서있게 유지될 수 있도록 기여했으며, 모란꽃이나 알을 많이 낳는 물고기와 게, 그리고 백동자 등이 많이 그려진 것은 부귀영화(富貴榮華)나 부귀다남(富貴多男), 자손번성(子孫蕃盛)같은 민간의 소박한 염원을 적극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이렇게 민화는 선조들의 꿈과 사랑, 도덕과 윤리, 신앙과 종교, 학문존숭 등을 표현하는 기능을 하였으며 그 중 두드러진 것이 장식의 용도로써 화려한 채색과 뛰어난 장식성을 지니어 절대다수가 화조화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李朝の 民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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