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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명 반차도26
시대 1897
초록 1897년(光武 1)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황제 즉위식을 선포하러 가는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가 있어서 즉위식 현장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접할 수 있다. 네 종류의 반차도가 실려 있는데, 첫번째는 대례시 황제옥보 황태자책보 지궐 반차도로 황제의 옥보(玉寶)와 황태자의 책보(冊寶)를 궁궐로 가져오는 행렬도이다. 참가인원은 모두 183명으로서, 앞에서 수검과 경무관이 선도하고, 그 뒤에 황제보를 실은 요여(腰輿)와 황태자의 금책과 금보(金寶)를 실은 요여가 따르고 있다. 두번째 반차도는 황제의 옥보를 궁에서 내와 환구단으로 운반하는 행렬도이다. 참가인원은 모두 100명으로서 순검과 경무관이 앞에서 선도하고, 그 뒤를 황제의 옥보를 실은 요여가 따르고 있다. 세번째 반차도는 황후의 책보를 빈전으로 가져가는 행렬도로서 참가인원은 모두 107명이다. 순검과 경무관이 앞장서고 그 뒤를 금책과 금보를 실은 요여가 따르고 있다. 네 번째 반차도는 명헌태후(明憲太后)의 옥보와 황태자비의 책보를 궁궐로 가져오는 행렬도로서, 참가인원은 모두 184명으로서 명헌태후의 옥보를 실은 요여가 앞에서고, 황태자비의 책보를 실은 요여가 뒤를 따르고 있다. 행렬의 구성원은 앞의 것과 비슷하다.
출처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
자료명 반차도27
시대 1897
초록 1897년(光武 1) 고종이 황제에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황제 즉위식을 선포하러 가는 행렬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가 있어서 즉위식 현장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접할 수 있다. 네 종류의 반차도가 실려 있는데, 첫번째는 대례시 황제옥보 황태자책보 지궐 반차도로 황제의 옥보(玉寶)와 황태자의 책보(冊寶)를 궁궐로 가져오는 행렬도이다. 참가인원은 모두 183명으로서, 앞에서 수검과 경무관이 선도하고, 그 뒤에 황제보를 실은 요여(腰輿)와 황태자의 금책과 금보(金寶)를 실은 요여가 따르고 있다. 두번째 반차도는 황제의 옥보를 궁에서 내와 환구단으로 운반하는 행렬도이다. 참가인원은 모두 100명으로서 순검과 경무관이 앞에서 선도하고, 그 뒤를 황제의 옥보를 실은 요여가 따르고 있다. 세번째 반차도는 황후의 책보를 빈전으로 가져가는 행렬도로서 참가인원은 모두 107명이다. 순검과 경무관이 앞장서고 그 뒤를 금책과 금보를 실은 요여가 따르고 있다. 네 번째 반차도는 명헌태후(明憲太后)의 옥보와 황태자비의 책보를 궁궐로 가져오는 행렬도로서, 참가인원은 모두 184명으로서 명헌태후의 옥보를 실은 요여가 앞에서고, 황태자비의 책보를 실은 요여가 뒤를 따르고 있다. 행렬의 구성원은 앞의 것과 비슷하다.
출처 고종대례의궤(高宗大禮儀軌)
자료명 보도
시대 1897이전
초록 고종황제(高宗皇帝)가 국사(國事)에 사용하던 도장이다. 명칭은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人)'으로 인면(印面)에 새겨져 있으며, 재질은 은으로 만들고 그 위에 도금을 베풀었다('天銀鍍金'). 인장의 꼭지에 있는 영물(靈物)은 거북의 몸에 용의 머리가 조합된 것이다. 여러 문서에 사용되었으며, 대내(大內)에 봉안하였다. 보인의 보(寶)는 국왕의 옥새(玉璽)를, 인(印)은 일반적인 도장을 의미한다. 어보(御寶)는 국새(國璽)·어새(御璽)·옥새(玉璽)·국보(國寶) 등 여러 가지 표현이 쓰였으며, 일반적으로 임금의 인장을 칭하지만 왕비, 왕세자, 빈 등의 인장도 포함된다. 재질상 옥으로 만든 것은 옥새, 금으로 만든 것은 금보(金寶)로 나뉘며, 문서의 내용에 따라 각각 다른 옥새가 사용되었다. 문헌상으로 옥새에 관한 얘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후한서(後漢書)』와 『사기(史記)』로, 진시황이 화씨벽(초나라 화씨가 봉황새가 깃든 돌에서 캐낸 옥)을 입수해 그것으로 도장을 만든데서 유래한다고 한다(도장을 만든 재질이 옥이었기 때문에 임금이 사용하는 도장을 '옥새'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시황은 승상 이사를 시켜 이 도장에 '수명어천기수영창(受命於天其壽永昌: 하늘에서 명을 받았으니 그 수명이 영원히 번창하라는 의미)'이라는 글을 새겼다. 그후 진나라가 망하고 한나라가 서자 진시황의 손자인 자영은 옥새를 한 고조 유방에게 바쳤고 한 고조가 이 옥새를 차고 다니자 이를 '전국의 옥새'라고 불렀으며, 이때부터 옥새는 황제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예왕(穢王)이 '예왕지인(穢王之印)'을 사용한 것이 시초이며, 고려때는 요·금 등이 왕에게 금인(金印)을 하사하고, 원에서 '부마국왕선명정동행중서성(부馬國王宣命征東行中書省)'의 도장을 보내왔으며, 명에서는 1370년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라는 도장을 보내왔다. '위화도 회군'을 통해 성립한 조선왕조는 명나라에 옥새를 내려줄 것을 요청했는데, 옥새를 하사받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는 것으로 이때부터 조선왕조의 옥새는 중국으로부터 하사받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당시 옥새의 영물(靈物)은 거북이로, 이것은 중국이 변방의 제후들에게 내리던 상징물이었다. 조선왕조는 중국에서 하사한 옥새는 중국과의 외교문서등에 사용하였고 국내문서에 사용하던 것은 자체 제작하였는데, 이 자체 제작한 옥새에 들어있는 거북이의 모양은 중국과의 관계에 따라 변화하였으며,
출처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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