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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오행사상과 전통시대의 색채의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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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시대의 색채관념
[圖 1] 오방정색(五方正色)과 오방간색(五方間色)

위의 오방간색은 오행상극(五行相克)의 원리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오행상생(五行相生)의 원리에 따라 다섯 가지 간색을 만들기도 한다.
※『 규합총서(閨閤叢書) 』「染色諸法」
“목생화(木生火)에서 청적간색(靑赤間色)이 되니 정(짙은 보라)이고, 화생토(火生土)가 황적간색(黃赤間色)이 되니 훈(분홍)이며, 토생금(土生金)이 황백간색(황백간색)이 되니 규(硅, 연두)가 되고 금생화(金生水)하여 백흑간색(白黑間色)이 되니 불(쟂빛)이며, 수생목(水生木)하여 청흑간색(靑黑間色)이 되니 암(천청색)/참(민색)이다.”
이밖에도 사물이나 자연현상으로부터 연상된 색명, 물감의 제작 과정으로부터 유래하는 색명이 있었고, 또 밝고 어두움, 진하고 옅은 정도의 차이에 따라 많은 색을 인식하였으며 이는 전통의 다양한 색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사용하는 물감은 기술의 한계 등으로 인하여 제한되어 있었다.
2) 음양론
왕실축제에는 왕실의 화려함과 위엄을 보여주는 각종 의장품과 의장기가 등장한다. 그리고 의장품과 의장기들이 상징하는 의미들은 이들이 지닌 색채를 통해 표현되며, 그 의미들은 전통시대의 사상체계, 그 중에서도 특히 음양오행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본 장에서는 왕실축제에 반영되어 있는 전통시대의 사상 체계를 파악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서, 음양오행사상의 기초 이론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음양오행사상(陰陽五行思想)
음양오행사상은 우주와 자연의 생성·소멸 및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을 음양(陰陽)의 소장(消長)·변전(變轉)과 오행(五行)의 순환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으로, 조화와 통일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론과 오행론은 원래는 각각 독립되어 있던 사상이었는데, 대략 기원전 4세기초인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서로 결합되기 시작하여 자연과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설명하는 틀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두 이론은 하나의 정합적인 사상으로 통합되었다.

① 음양론(陰陽論)
음양오행사상은 우주와 자연의 생성,소멸 및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을 음양(陰陽)의 소장(消長),변전(變轉)과 오행(五行)의 순환으로 설명하려는 이론으로, 조화와 통일을 강조하는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음양론과 오행론은 원래는 각각 독립되어 있던 사상이었는데, 대략 기원전 4세기초인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서로 결합되기 시작하여 자연과 사회의 여러 가지 현상들을 설명하는 틀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한대(漢代)에 이르러 두 이론은 하나의 정합적인 사상으로 통합되었다.
음양(陰陽)이라는 두 글자는 어원적으로 볼 때 각각 어두움(음)과 밝음(양)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음(陰)에는 언덕(丘)과 구름(雲)의 상형이 포함되어 있으며 양(陽)에는 모든 빛의 원천인 하늘이 상징되어 있다. 이에 따라 음은 여성적인 것, 수동성, 추위, 어두움, 습기, 부드러움을 뜻하게 되었고, 양은 남성적인 것, 능동성, 더위, 밝음, 건조함, 굳음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두 개의 상호보완적인 힘이 우주와 자연을 발생,변화,소멸시킨다고 보는 것이 음양론이다.
음양(陰陽) 이전의 상태
음양 이전에는 두 기운이 분리되지 않고 서로 엉켜 있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음양으로 나뉘기 전에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형태는 혼합된 기운일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혼돈(混沌)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혼돈은 ‘뒤죽박죽’이라는 뜻도 있지만, 명확하게 나눌 수 없음을 가리키는 말도 된다. 예를 들어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시간, 이를 일러서 혼돈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적절한 표현이 될 것이다.


음양(陰陽)의 분리
하나의 덩어리였던 혼돈에 어떠한 작용이 개입하면서 음양으로 분리가 되었다. 크고 작음, 높고 낮음, 맑고 탁함 등의 구분을 하게 되는 것이 음양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음양은 서로 상반된 형태를 하고 있다. 음양의 대립구조는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데,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음양은 고정적이 것이 아니라 상대적이다. 다른 것과 비교를 통해 음양이 결정되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음양 될 수도 있고 양이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밝기의 정도가 서로 다른 A, B, C가 있다고 가정하자. A보다 B가 밝고 B보다 C가 밝다면 B는 A와의 관계에서는 양이 되고 C와의 관계에서는 음이 된다. 이처럼 음과 양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또 비교 대상에 따라 변화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음양(陰陽)의 순환
음양은 기본적으로 대립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균형을 맞추어 가려는 성격을 가진다. 어느 한 쪽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반드시 그 반작용이 일어나 강한 것이 약해지고 약한 것이 강해진다. 즉 양의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면 거기에서 다시 음의 기운이 생성되고, 음의 기운이 최고조에 이르면 그 순간 다시 양의 기운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시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시소는 양쪽이 번갈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균형을 맞추는데, 여기에서 올라가는 것이 양이고 내려가는 것이 음이라고 보면 균형의 원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음양은 서로 끊임없어 돌고 돈다. 낮과 밤이 서로 교차되는 것, 달이 차면 다시 기우는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 또 1년의 사계절이 항상 규칙적으로 순환을 하는 것 등이 음양의 순환을 증명해 준다.
음양(陰陽)에서 오행(五行)으로
음과 양이 서로 균형을 맞추어 가는 과정에서 음양의 비율에 따라 사로 다른 형태가 나타난다. 음과 양의 비율이 50 대 50이면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되고, 음양 중에서 어느 한쪽의 비율이 더 크면 비율이 큰 쪽의 성향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비율의 차이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이를 크게 다섯 가지 유형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오행(五行)이다. 따라서 오행은 엄밀하게 말하면 음양의 형상을 분류한 것으로, 음양의 각기 다른 모습을 정형화하여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오행론(五行論)
오행론은 음양론을 바탕으로 성립되었다. 오행이란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다섯 가지 원소를 말한다. 이 다섯 가지 원소가 유행(流行)·변전(變轉)하여 만물을 생성한다는 것이 초기의 오행설이다. 위의 다섯 원소가 선별된 것은 이것들이 인간의 일상 생활에서 결코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① 오행(五行)의 생성
『주자어류(朱子語類)』에는 오행의 생성과 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즉 하나의 기가 혼돈되어 있던 상태에서 기의 맑은 기운이 양이 되고 탁한 기운이 음이 되며, 맑은 양기에서 불(火)이 생성되고 탁한 음기에서 물(水)이 생성된다. 그리고 물이 다시 탁해지면서 흙(土)이 땅이 생성되고 맑은 불의 기운은 하늘이 된다. 이어 흙 속에서 나무(木)와 쇠(金)가 생성되어 오행이 모두 갖추어지게 된다. 이상과 같은 생성 과정을 도식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위의 도식에서 보듯이 오행은 음양을 바탕으로 하여 발생한 것이므로, 결국 음양과 오행은 동일한 기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행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은 곧 음양의 이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자연과 인간 사회를 설명할 때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이론들은 대부분 오행과 관련된 것들이다.
② 오행의 속성(屬性)

오행은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 물리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⑴ 목(木) : 동방과 봄을 상징하며, 또 그 안에 불(火)의 기운이 숨어있기 때문에 온화하고 따스하며 부드러운 속성을 가진다.
⑵ 화(火) : 남방과 여름을 상징하며 화는 밝고 뜨거우며 치열하게 타오르는 속성을 갖는다.
⑶ 토(土) : 글자에 '토해낸다(吐)'라는 의미가 있으며, 정기를 머금었다 토해냄으로써 사물을 생성시킨다는 속성을 갖는다.
⑷ 금(金) : 서방과 가을을 상징하며 글자에 '금지'의 의미가 있어서, 음의 기운이 처음 일어나서 만물의 성장을 금지시킨다는 속성을 갖는다.
⑸ 수(水) : 북방과 겨울을 상징하며, 차갑고 습한 속성을 가진다. 물의 표면이 수평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만물을 평준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고, 또 물이 땅을 적신다는 점에서 사물을 윤택하게 한다는 의미도 갖는다.
③ 오행의 배속(配屬)
오행설에서는 자연과 인간 사회의 모든 일들을 오행으로 설명한다. 즉 계절, 방위, 수, 색, 맛 등을 비롯하여 사람의 몸과 성격, 정치, 도덕 등 제현상들을 모두 오행에 입각하여 분류하는데, 이를 배속(配屬)이라고 한다. 오행의 배속을 정리하면 [표 3]과 같다.

4) 오행(五行)의 상생(相生)·상극(相剋)·부억(扶抑)
① 상생(相生)
㉠ 목생화(木生火) : 나무의 성질이 따뜻하여 불이 그 속에 숨어 있다가 마찰해서 뚫고 나온다. 그러므로 목이 화를 낳는다.
㉡ 화생토(火生土) : 불은 뜨겁기 때문에 나무를 불태우고 나무가 타면 재를 이루니 재는 곧 흙이다. 그러므로 화가 토를 낳는다.
㉢ 토생금(土生金) : 쇠는 돌 속에 있어서 산의 습기가 응고되어 생기고 흙이 모여서 산을 이루니 산은 반드시 돌을 낳는다. 그러므로 토가 금을 낳는다.
㉣ 금생수(金生水) : 소음의 기운은 윤택하여 진액이 흐르고 또 쇠를 녹이면 물과 같이 된다. 그래서 산에 구름이 끼고 습기가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금이 수를 낳는다.
㉤ 수생목(水生木) : 나무는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수가 목을 낳는다.
② 상극(相剋)
오행은 꺼리는 것을 따라서 서로 극(剋)을 한다. 극은 제재하고 벌하는 것이니 힘이 강한 것으로 약한 것을 제재하기 때문에 목이 토를 극하고, 토가 수를 극하고, 수가 화를 극하고, 화가 금을 극하며, 금이 목을 극한다.
③ 부억(扶抑)
상생,상극과 유사한 개념으로 오행의 부(扶)와 억(抑)이 있다. 부(扶)는 보조한다는 뜻이고 억(抑)은 억제하여 그치고 물러나게 한다는 뜻이다. 오행이 흥성하고 쇠퇴함에는 때가 있고 높고 낮은 것은 서로 바뀌며 대신하기 때문에 부하고 억하는 것이 서로 만나게 된다.
㉠ 오행의 부(扶) : 목(木)은 수(水)를 보조하고, 수(水)는 금(金)을 보조하고, 금(金)은 토(土)를 보조하고, 토(土)는 화(火)를 보조하고, 화(火)는 목(木)을 보조한다.
㉡ 오행의 억(抑) : 목(木)은 화(火)를 억제하고, 화(火)는 토(土)를 억제하고, 토(土)는 금(金)을 억제하고, 금(金)은 수(水)를 억제하고 수(水)는 목(木)을 억제한다.

5) 전통 복식을 통해 본 색채의식
①오행 중심의 색관념과 전통 복색(服色)
우리 나라의 전통 복식은 색상의 중요성을 제외하고는 논의할 수 없다. 옷의 형태적인 측면이나 재질도 중요하지만, 색상의 중요성이 무엇보다도 크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전통 복식의 색깔 논의에서 집중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방위에 따른 오방색이다.
우주와 인간 세계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존재를 다섯 가지의 요소로 정리한 오행설은 색채까지도 다섯으로 규정짓고 우주의 모든 개념을 다섯 가지 기본색과 연결지으려 하였다.
오행사상에서는 색을 정색(正色)과 간색(間色)으로 나눈다. 먼저 정색은 동쪽의 청색, 남쪽의 적색, 서쪽의 백색, 북쪽의 흑색, 중앙의 황색 등 5가지 색으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각각의 사이에 끼어있는 색을 간색이라고 하였는데, 홍색(紅色),벽색(碧色),류황색,녹색(綠色),자색(紫色)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오방의 정색과 간색을 중심으로 하여 여기에서 파생되는 색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과 같은 색 개념은 방위나 계절에도 적용되어 옷의 색깔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여복제도(與服制度)가 처음 확립된 것은 후한(後漢)때였는데, 이 때 계절에 따라 문무백관의 관복 색깔을 변화시키는 오시(五時)의 복색(服色)이 규정되었다.
또 『예기(禮記)』의 『월령(月令)』에서도 이와 같은 예를 찾을 수 있는데, 즉 “이 달은 천자가 명당(明堂)의 남동쪽에 있는 곁방에서 정사를 보살핀다. 주색(朱色)의 난거(鸞車)를 타며, 적색 말을 타고 적색 기를 세우며, 주색 옷을 입고 적색 옥을 차고 숙(菽)과 닭을 먹는다.”고 한 것은 철저하게 방위와 계절의 색을 지키려는 인식을 보여준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백의(白衣) 금지령이 자주 내려진 것도 방위에 따른 색 관념에서 나온 것이다. 1275년(고려 충렬왕 1)에 태사국(太史局)에서 “동방은 목(木)의 자리이니 색은 마땅히 청색을 숭상해야 합니다. 백(白)은 금(金)의 색인데,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융복(戎服)을 입고 흰 모시옷을 많이 입으니 이는 목(木)이 금(金)에게 제어받는 형상입니다. 청컨대 흰옷을 금하게 하소서.”라고 건의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권80, 예고(禮考) 27, 장복(章服)]. 이는 오행 사상에 근간을 둔 방위 개념에 기초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의복에 사용된 전통색은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물론 이 다양한 색깔의 기본색은 청,황,적,흑,백(靑,黃,赤,黑,白)의 5색이고 이들의 농담(濃淡)에 따라 다양한 색이 창출된다. 이 색의 명칭은 염색의 방법을 알려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색에 대한 감각 표현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② 청색 인식과 그 의복
청색은 오행으로 따지면 목(木)에 해당하고 동방을 뜻하며, 계절로는 봄이다. 청색은 태어남의 의미를 지니며, 물체가 소생하는 때의 색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청색에서 파생된 색들은 벽색(碧色) 계열과 녹색(綠色) 계열로 구분된다.
벽색 계열에는 창(蒼), 남(藍), 아청(鴉靑), 청현(靑玄), 유청(柳靑), 창황(蒼黃) 등이 포함된다. 창(蒼)은 면류관에 다는 구슬을 색을 말한다.
남(藍)은 일람(日藍),양람(洋藍),품람(品藍) 등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청색에 검정이 섞인 색이다. 왕비가 궁녀들이 가례 때는 남색 겹치마를 입고 그 위에 자주색 치마를 입었다.
젊었을 때는 대개 자주색이나 홍색 치마를 입지만 나이가 들면 남색 치마를 겉치마로 입었다. 또 혼자된 왕비나 대왕대비도 남색 치마를 입었다. 세자빈의 법복(法服)인 적의(翟衣)도 남색 바탕이다.
아청(鴉靑)은 검은빛을 띤 푸른색으로 조선시대 조신(朝臣)들의 관복 색깔로 규정되어 단령, 이엄, 감투 등에 사용되었다.
청현색(靑玄色)은 푸른빛이 도는 검은색으로, 조선시대에 당상관이 남색 철릭을 입은데 반하여 당하관은 청현색 철릭을 사용하였다.
녹색 계열에는 비색(翡色), 연두(軟豆), 옥색(玉色), 흑유색(黑幼色) 등이 있다.
비색(翡色)은 남색과 청색의 중간색이고, 연두(軟豆)는 녹색과 황색의 중간색으로 원삼,당의,저고리,두루마기 등 주로 여성의 의복에 많이 사용되었다.
지한 녹색은 일반 서민이나 계급이 낮은 수모(手母)의 저고리로 사용되었다. 흑유색(黑幼色)은 검푸른 청색으로, 성종대에 조신들의 단령의 색으로 정한 적이 있다.
옥색(玉色)은 약간 푸른빛을 띤 파르스름한 색으로 조선시대에 궁중에서 왕비의 회장저고리나 왕의 평복에 사용한 예가 보인다. 궁녀들의 회장저고리 바탕색으로 궁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한 색이다.
왕비도 혼자되면 회장저고리가 아닌 민옥색 저고리를 입었고, 왕은 대개 옥색 저고리, 옥색 두루마기가 통례이다.
『오례의(五禮儀)』에 임금의 상(喪)에서 졸곡(卒哭) 후에 백관들이 옥색 단령을 입도록 하였고, 중종대에는 릉(陵)을 옮길 때 백관들이 옥색의 옷을 입도록 하였다.
또 청색 계열에서 흔히 쓰인 색으로 감색(紺色)이 있다. 감색은 청색과 적색이 섞인 것으로, 적색으로 먼저 염색한 다음, 그 위에 남색으로 염색한 것이다.



③ 백색 인식과 그 의복
동월(董越)의 『조선부(朝鮮賦)』에 우리 민족은 흰옷을 좋아한다고 기록할 만큼 백색은 상고시대부터 우리 생활에 중요한 색이었다. 이 백색의 방향은 서(西)쪽이고, 계절은 가을이며, 의(義),상(商),금(金)을 상징한다.
백색이 의복의 색깔로 제한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로, 오행설의 방위 개념에 따라 동방에 속하는 우리 나라는 의복에 있어서도 청색을 숭상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러한 백의 금지의 논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오행상극의 논의가 더욱 강하게 작용하면서 여러 차례 금령이 내려졌다.
명종대 이후 사람들이 점점 백의를 즐겨 입자 선조대에 다시 백의를 금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현종대에는 백의 금지를 강력히 시행하여 사대부(士大夫)와 일반인 모두 이를 준행하도록 하였고, 백의 대신 담청색(淡靑色) 옷을 입도록 하였다. 또 백의를 입는 자는 엄벌에 처하도록 명시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3).
이러한 영향에서인지 일상 의복에서는 백색을 꺼리게 되었다. 바지나 속옷, 버선 등에 흰색을 썼던 것이 확인되는 정도이다.
④ 황색 인식과 그 의복
황색은 방위로 보면 중앙을 나타내고 신(信),궁(宮),토(土)를 상징한다. 『석명(釋名)』에서는 밝음을 상징하며 햇빛의 색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황색은 중앙을 상징하고 또 황제가 황색의 복색을 착용하였으므로 조정의 신하들은 황색의 옷을 착용하지 못하였다. 신라 법흥왕때 제정된 대사(大舍)에서 선저지(先沮知)까지의 하품 관리의 복색 규정이나 834년(신라 흥덕왕 9)의 복식금지령 등에서 일반인들의 황색 사용을 금지한 기록들이 보인다.
조선에서도 황색금지령은 복색금지령 중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나타내고 있는데, 특히 태종~세종대에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송화색이나 치자색의 못은 색이 주는 안정감으로 인해 부녀자들이 즐겨 입었다.
송화색은 황색보다 약간 연한 색이다. 영조대(1724~1776)의 세자 가례때 재간택에 선발된 처자에게 궁에서 송화색 저고리를 내린 적이 있다. 또 궁중의 나인들 중 젊은 사람들은 노랑 저고리를 입을 수 있었는데, 이는 이 색이 중국 황제의 황금용포의 색과는 달랐기 때문에 가능했다. 유물로 전해오는 영왕비의 송화색 저고리는 당의를 착용할 때 안에 바쳐입는 당의삼작용으로 사용한 것이다. 또 평상복으로 착용하였던 삼회장 저고리도 전해지는데 모두 궁중유물전시관에 보존되어 있다.
치자색은 진한 황색에 약간 붉은 기운을 띤 색으로, 치자를 염색의 재료로 사용하였다. 다년생 치자나무의 속씨 덩어리를 물어 담그면 진한 노랑색이 우러나오는데, 이것으로 천을 물들였다. 일반 서민들이 많이 사용한 색이며, 떡을 비롯한 음식을 물들일 때에도 사용하였다.
⑤ 적색 인식과 그 의복
적색은 방위로는 남방에 속하고 계절로는 여름에 속하는 색으로, 예(禮),미(美),화(火)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적색 계열을 색은 다시 홍색 계열과 자색 계열로 구분된다.
홍색은 조선시대 국왕의 곤룡포, 문무 관리의 단령(團領), 금관조복(金冠朝服), 동다리, 왕비의 원삼, 스란치마 등에 사용되었다. 홍색은 그 염료인 홍화(紅花),소목(蘇木) 등의 값이 비쌌기 때문에 여러번 금제가 내려졌던 색이기도 하다. 세종대에는 대홍염(大紅染)의 외의(外衣)를 조신들이 입지 못하게 하였고 또 양반 부녀자들의 외의와 서인(庶人),천인(賤人) 남녀의 내,외의에도 대홍색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강(絳),훈,비(緋) 등이 홍색 계열 색명들이 여러 문헌에 나타나고 있는데, 왕의 공복(公服)인 강사포(絳紗袍)나 훈상 등과 같이 아예 색 이름이 의복의 이름에 붙어 정착된 경우도 있다.
중국 한(漢)나라 때에 만들어진 『석명(釋名)』의 내용을 중심으로 적색과 그 간색에 대해 살펴보면, 먼저 강색(絳色)에 대해서는 『석명』에서 “강색은 정교한 색으로 염색하여 표현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이 색을 얻으면 정교하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또 『설문(說文)』에는 “수(蒐),모수(茅蒐),여로(茹蘆) 등을 염색의 재료로 사용하여 강색을 나타낼 수 있다.”라고 하였다. 모수(茅蒐)는 꼭두서니인데, 이 뿌리에서 빼낸 물감으로 염색한 적색이 강색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색 계통의 염색에는 수은주(水銀朱)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때 나오는 색이 주색(朱色)으로, 수은주(水銀朱)를 속(粟)과 함께 삶아서 그 즙에 우근(羽根)을 담가 염색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3회 담그면 훈색이 나오며, 이것을 다시 흑색의 안료에 담그면 취색(翠色)이나 치색(緇色)을 낸다.
훈색은 강색(絳色)이나 주색(朱色)보다 연한 색으로, 『설문』에는 “순색은 옅은 강색이다.”라고 하였으며 『시경(詩經)』『빈풍칠월』의 모전(毛傳)에는 “주색이 훈색보다 깉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의 색 이름으로 보면 분홍색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홍색(紅色)에 대해서는 『석명』에서 “홍(紅)은 강(絳)이다. 백색 중에서 강색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설문』에서는 “홍색은 적색과 백색의 중간색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수은주에 의한 염색으로 1회 염색한 것이 홍색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홍색 계열에서 토홍(土紅)이 많이 쓰였다. 토홍은 주토(朱土)를 염재로 하여 염색한 붉은 계통의 색이다. 주토를 침수시켜서 그 찌꺼기를 뽑아내고 여기에 아교를 섞어서 염색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상색으로 여겼다. 조선 성종대(1469~1494)에는 “몇년 전부터 표의(表衣)에 일정한 제도가 없이 세탁하기에 편리하다는 이유로 모두 토홍색을 좋아하니 매우 조채(朝彩)가 없다. 이제부터 잡색은 편한대로 입고 토홍색 외의 것을 길복으로 통용하라.”라는 명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후에는 한동안 조정 문무대신의 포의(袍衣)를 갖추지 못하다가 1600년(선조 34)에 비로소 조복을 갖추게 되었다. 처음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은 심홍(深紅)의 비단을 입고 당하관은 심홍의 면포를 도록 하였다가, 국왕도 역시 홍의(紅衣)를 입기 때문에 군신이 같은 색을 입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하여 신하들의 복색을 흑색으로 바꾸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귀천의 구분 없이 홍람(紅籃)으로 염색한 옷을 선호하였는데, 염료의 가격이 높았기 때문에 옷을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고, 옷 한 벌을 염색하기 위한 나무를 기르는데 한 가정의 1달치 식량에 해당하는 비용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진홍(眞紅)은 분홍 계통 중에서 가장 짙은 색으로, 도홍(桃紅)과는 농담의 차이가 있다. 분홍 계통의 색은 다홍(多紅),대홍(大紅),진홍(眞紅) 등으로 구분하였다. 도홍(桃紅)은 연한 분홍색으로 조선시대에 한때 흰옷 입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면서 선비들의 겉옷에 모두 도홍색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 있었으나 시행한 지 5, 6년만에 중지되었다.
다음으로 자색(紫色)은 황색과 더불어 자주 금지령이 내려졌던 색으로 왕비나 세자빈의 법복에서 치마색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 석명』에는 “자(紫)는 자(疵: 흠, 결점)의 뜻이다. 정색(正色)이 아니고 오색의 흠과 같아서 사람을 현혹시킨다.”라고 하였다.
자색에 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색에 대한 이미지와 큰 차이가 있다.

⑥ 흑색 인식과 그 의복
흑색은 오행으로는 수(水)에 해당하며 방위는 북쪽, 계절은 겨울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의 의복에 많이 쓰였으며 조신들의 관복에도 선조 이후 흑단령을 착용하게 되었다.일반서민,부인들도 무명에 검정색으로 물들인 치마를 입었으며, 저고리는 소색(素色)을 그대로 써서 무명저고리를 착용하였다.
흑색 계열의 색으로는 치(緇),조(早) 등의 이름이 문헌이 등장한다.
『석명』에 “치(緇)는 재(滓)의 뜻으로 진흙 중에서 검은 것을 재(滓)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주례(周禮)』에 대한 한대(漢代)의 주석에는 “훈색“으로 염색하려면 적색 안료액에 3회 담그면 된다. 이것을 다시 흑색 안료액에 2회 담그면 취(翠)가 되는데, 취는 작두색(爵頭色)이다. 이것을 다시 흑색 안료로 2회 염색하면 치(緇)가 된다...(중략)....정현은 ‘현(玄)'은 취(翠)와 치(緇)의 중간색이다. 치보다 1회 적은 6회 정도 염색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과 같이 치색은 적색으로 염색한 후에 다시 흑색으로 염색한 것이다. 그리고 위 주석의 내용을 볼 때 중국 한나라 때에는“치→현→취“의 순으로 흑색이 점차 엷어져 간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석명』에는 치색과 함께 조색(早色)을 들고 있는데, “조(早)란 아침을 말한다. 해가 뜨기 전에 일찍 일어나 물체를 보면 모두 검게 보이는데 이 색은 그 검은 색을 말하는 듯하다.”라고 하였다.
반면에 『설문』에서는 조(早)를 초(草)로 쓴 다음 “초는 초두(草斗)를 말하니 가죽나무의 열매이다. 혹은 상두(象斗)라고도 한다.”라고 하였다. 철의 매염제로 도토리 껍질을 삶은 물로 물드리면 깉은 자색을 띤 흑색이 되는데 조(早)를 이 색으로 보면 틀리지 않은 것이다.
흑색의 간색으로 회색을 들 수 있다. 회색은 『규합총서(閨閤叢書)』에 “좋은 중국 먹을 갈아서 물에 타고 신초를 조금 쳐서 흰 명주나 비단을 물들이면 깉은 재빛이 붉고 푸른빛을 띠어 품스럽고 고우며 향내가 기이하다.”라고 하여 회색의 염색법을 설명하고 있다.
세종조(1418~1450)에 “개국한 이래로 문무조관이 모두 회색 단령을 입었는데, 뒤에 동방은 목(木에 속하니 상서롭지 못하다.”라고 하여 회색의 사용을 금하였으며, 이후로는 주로 상복이나 승복 등에만 사용되었다. 조선조 말에 와서는 동궁비의 가례 때에 대례복 적의(翟衣) 속에 받쳐입는 의대에 회색 중단을 사용하였으며, 남자 한복의 바지색으로도 회색을 사용하였다.
구색(鳩色)도 회색과 더불어 승복에 많이 사용되었다. 먹을 갈아 물들이거나 숯을 갈아서 물들였다는데, 고려시대부터 승복에는 구색 또는 회색이 사용되었다. 한편 조선초에는 승려들의 흑색 사용을 금한 바가 있었는데, 이는 흑색을 옅게 물들이면 은은한 옥색과 같이 보이기 때문에 이를 제지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전통 복식에서 사용하고 있는 색을 오방색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생활의 기저를 이루고 있던 음양오행사상이 의복의 색을 규정하는 데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을 확인하였으며, 특히 황색이나 백색의 경우에는 오방의 개념을 준용하려는 의식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또 오방색을 중심으로 생성된 다양한 간색들의 색상 명칭에서 색에 대한 인식을 찾을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6) 의복색의 시대적 변화
① 삼국의 공복색(公服色)
고구려의 국왕은 오채복채(五采服彩)를 입었고 백라(白羅)로 관을 만들어 썼으며 혁대에는 금테를 둘렀다. 신하들은 청라관(靑羅冠) 혹은 강라관(絳羅冠)을 썼는데 새 깃을 꼿고 금·은으로 테를 둘렀으며, 백위대(白韋帶)를 두르고 황혁리(黃革履)를 신었다. 『북사(北史)』 고구려조에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에 절풍을 쓰는데 모양이 변(弁과) 비슷하다. 사인(士人)들은 두 개의 깃을 더 꼿는다. 존귀한 자는 자라(紫羅)로 만들고 금은으로 장식한 관을 쓰고 대수삼(大袖衫, 통소매 저고리)과 대구고(大口袴, 통이 큰 바지)를 입고 소피대(素皮帶)를 매고 황혁리를 신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 고구려의 관인들이 착용하였던 복식의 색채를 정리하면 자색, 청색, 강색, 비색, 황색 등이다.

백제의 국왕은 자색의 대수포(大袖袍)에 바지는 청금고(靑衿袴)를 착용하고 소피대를 매고 금화(金花)로 장식한 오라모(烏羅帽)를 썼다. 16관제의 신하들의 경우 관복의 색은 비색(緋色)으로 모두 동일하였지만 대(帶)의 색에 차등을 두어 7품은 자색, 8품은 조색, 9품은 적색, 10품은 청색, 11품은 황색, 13품은 백색의 대를 띠도록 규정하였다. 반면 일반 서민들에게는 자색과 비색의 사용을 금하였다. 여기에서도 자색, 청색, 비색, 조색, 황색, 백색 등의 색 이름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신라에서는 법흥왕(514∼540) 7년에 처음으로 백관공복의 차서를 정하였는데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편 무관의 등급을 상징하는 깃발의 색으로는 녹색, 자색, 백색, 비색, 황색, 흑색, 벽색, 적색, 청색 등 9가지 색을 비롯하여 저황, 비홍, 황설(黃屑), 자분(紫粉), 멸자(滅紫), 표, 취벽(翠碧), 벽자(碧紫) 등의 분화된 색 이름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상 관복의 색상을 통해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은 자색, 청색, 비색, 강색, 황색 등의 색을 기본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중 강색은 고구려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삼국 모두 자색을 가장 우위에 둔 공통점이 있으며, 오방색 가운데 중앙의 색이라고 하여 중국 왕제의 복색으로만 사용되던 황색이 신라의 공복 체계에서는 맨 아래인 제4등급의 색으로 채택되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② 고려의 공복색
고려의 공복 제도는 광종대에 4색 공복제로 정비되었으며, 이후 관직 체계의 변화에 따라 중기 의종대에 개정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표 7]과 같다.
한편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왕의 복식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상복(常服)·조복(朝服)·제복(祭服)·공복(公服)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상복·조복은 착수상포(窄袖 袍), 제복은 구장복(九章服), 공복은 자라공복(紫羅公服)을 사용하였다.
영관(令官)·국상(國相)·근시(近侍)·종관(從官)·경감(卿監) 등은 자문라포(紫文羅袍)에 각각 대(帶)를 달리 하였으며, 조관은 비문라포(緋文羅袍), 서관은 녹의(綠衣)를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와 아울러 귀부인은 백저포(白苧袍)에 문릉관고(文綾寬袴)를 착용하였고, 귀녀는 황의를 착용하였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 등은 신분의 차이에 따른 복색의 구별이 없었다
고려의 공복에서는 녹포가 처음 등장한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③ 조선의 의복색
국왕의 의복
ⅰ) 면복(冕服)
왕이 종묘에 제사를 지낼 때에 착용한 제복으로, 면관(冕冠), 장복(章服), 상(裳), 폐슬(蔽膝), 말석(襪 ) 등으로 구성된다. 면관은 겉을 흑모라(黑毛羅)로 싸고 안은 붉은 비단으로 배접하였다. 또 면관 앞과 뒤에는 주, 백, 청, 황, 흑 등 5색의 구슬을 순서대로 꿰어늘였다.
면관에서 채용하고 있는 현색(玄色)과 홍색(紅色)은 각각 음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음과 양의 화합에 의한 우주의 조화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면관의 앞뒤에 늘어뜨린 오색 구슬은 화(火)가 금(金)을 이기고 금(金)이 목(木)을 이기고 목(木)이 토(土)를 이기고 토(土)가 수(水)를 이기고 수(水)가 화(火)를 이긴다는 오행상극(五行相剋)의 순환 원리를 표현하고 있다.
또 제복의 일부인 방심곡령이나 직령, 단령 등에 흑선(黑 )을 두른 것도 우리 나라가 수근목간(水根木幹)의 땅이기 때문에 '흑(黑)으로 부모를 삼고 청(靑)으로 몸을 삼는' 오행사상에서 연유된 것이다.
장복을 흑색으로 하고 상과 폐슬을 훈색으로 한 점 역시 각각 천지를 상징하여 조화를 꾀하려고 했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아여 할 것야다. 정색인 흑색을 위에, 간색인 훈색을 아래에 착용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배려한 것이며, 면관의 흑색과 말석의 홍색 역시 음양관계의 표현이다.
이상과 같이 왕의 제복인 면복에 쓰인 여러 가지 색들은 천지·음양의 조화를 꾀하려는 의식이 표현된 것이다.


ⅱ) 황용포(黃龍袍)
대한제국기에 황제가 착용한 시무복이다. 1897년에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한 후 『대명회전(大明會典)』을 근거로 새롭게 단행한 복제 개혁에서 황제의 시무복을 황룡포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황후도 황원삼(黃圓衫)을 대례복으로 입게 되었다.

왕비의 의복
ⅰ) 홍원삼(紅圓衫)
궁중에서 왕비가 예복으로 착용한 의복이다. 겉은 홍색 단이나 사(紗)로 하고 안은 황색을 썼으며 남색 단을 둘렀다. 겨드랑이가 트이도록 만들었으며 뒷자락에 비하여 앞자락이 짧다.
소매 끝에는 황색, 남색의 색동과 백색 한삼을 달았는데, 문양은 목단문이다.홍원삼의 색은 포의 색인 홍색을 중심으로 황색, 남색, 백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궁중의 예복에 겉감과 안감의 색을 달리하고 색동을 통하여 색이 조화를 꾀하려 한 것은 미적인 기준은 물론 음양의 조화도 함께 고려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ⅱ) 당의(唐衣)
비빈이나 사대부가의 부인들이 소례복으로 착용하던 겉옷의 일종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당의의 형태를 보면, 겉은 연두색 고단으로 꽃과 문자 문양이 자수로 새겨져 있고 안은 홍색이며, 소매 끝에는 백색의 거들지를 달았다. 당의에서도 역시 청색계의 겉감과 홍색계의 안감을 써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자 하였으며, 백색의 거들지 또한 오행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의를 착용할 때에는 먼저 속적삼을 입고 그 위에 진분홍 남색끝동 저고리, 송화색 삼회장 저고리, 당의를 순서대로 입는다. 이를 '저고리 삼작'이라고 하는데, 각각의 특색있는 미적형태와 색채배합은 뛰어난 조화미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속적삼의 백색, 진분홍 남색끝동 저고리의 홍색과 남색, 송화색 삼회장 저고리의 황색과 홍색 등이 2중 3중으로 음양의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다.


ⅲ) 남(藍) 수란치마
겉은 남색 목단문사이고 안은 백색 삼팔주로 만든 스란치마이다. 스란단에는 화염문을 사이에 두고 봉황이 마주보고 있는 봉황문양이 부금되어 있다. 총 8폭으로 되어 있는데 허리 말기와 끝은 백색 생고사로 만들었다.
남색 스란치마는 홍색 대란치마 안에 착용하였는데, 착용시에 홍색 대란치마를 조금 올려 입어서 안에 착용한 남색 스란치마의 스란단에 부금된 봉황문양이 드러나도록 하였다. 이 경우 남색과 홍색의 색감, 그리고 스란단에 부금된 문양이 조화를 이루어 한층 품위를 더했다. 물론 여기에서도 음양을 나타내는 색상의 조화를 엿볼 수 있다.

일반인의 의복
ⅰ) 활옷과 원삼
활옷은 왕실에서 공주, 옹주의 대례복으로 착용하거나 양반가에서 혼례복으로 착용한 대표적인 여성 예복이다.
형태는 다홍색 바탕에 깃 섶 무가 없이 트여 있는데 앞자락은 둘, 뒷자락은 등솔 없이 하나로 모두 세 자락으로 도어 있으며 앞이 뒤보다 짧다.
온 전체에 장수와 길복(吉福)을 상징하는 심장생, 모란, 나비 등의 문양을 수놓았으며, 또 혼례의 복됨이나 부귀의 기원을 담은 글귀를 새겨놓았다.
또 양 어깨의 앞에 동자의 문양을 수놓은 것도 특징적인 모습이다.

안감은 남색견으로 하고 소매에는 홍색, 황색, 남색의 색동을 달며 끝에는 모란 문양 등을 수놓은 백색 한삼을 달았다. 활옷 안에 입는 다홍색 치마에 노항색 삼회장 저고리는 모든 것이 흙에서 성장된다는 운이에 바탕을 두고 미혼 여성의 예복 색으로 정하였다.
참고로 복식의 색과 오행의 상생·상극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혼례복으로 쓰인 옷은 활옷 외에 원삼이 있다. 원삼의 형태는 앞의 홍원삼과 같으나 색깔이나 문양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데, 즉 연두색 겉감과 홍색 안감을 쓰며 소매는 색동으로 하였다.
혼례의 예물에서 음양의 원리는 철저하게 지켜졌다. 예서에 규정된 함의 내용물을 보면, 대개 청색과 홍색 옷감 각 한벌씩을 예물로 넣었는데, 이때 청색 비단은 붉은 간지에 싸서 청색 명주실로 동심결(同心結)을 맺어서 올려 놓고, 홍색 비단은 청색 간지에 싸서 홍색 명주실로 경사동심결(경사동심결)을 맺어 올려 놓았다. 폐백 보자기도 시아버지 것은 남색보를, 시어머니 것은 다홍색보로 달리 사용한 것도 이러한 원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ⅱ) 색동저고리
조선시대 복식 중에는 색동 옷감이 많이 쓰였다. 색동에 사용된 색의 배합이나 배열에는 음양을 나타내는 청색과 홍색, 오행을 상징하는 청·적·황·백·흑색 등이 거의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 색동에 음양오행설이 개입할 소지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색동에 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비율이 큰 차이가 없어서 색채의 배열에는 큰 의미를 두자 않았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박상의, 1978, [색동에 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오히려 색동에 사용된 5색의 의미는 오행, 오덕, 오미 등과 같이 숫자 5의 개념에서 차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색동에 즐겨 사용된 백색은 어느 색과도 잘 조화되면서 주변색을 더욱 선명하게 강조해 주기도 한다. 이는 조선시대 사람들의 탁월한 색채조화 능력과 융통성 있는 미적 취향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에서 복식 색채의 시대적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사상적 측면에서 우리의 일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던 음양오행설이 의례복의 색채 구성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성리학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기 이전에는 자색(紫色)이 색채의 중심을 이루었던 반면, 성리학적 생활 규범이 강조된 조선시대 이후에는 황색(黃色)이 중심색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한 것이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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