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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혼례복에 담겨진 색채 사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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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왕과 왕비의 혼례복과 색채
혼례식의 화려함과 장엄한 맛을 풍겨주는데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궁중 복식이다. 궁중복식이 지니는 가장 큰 의미는 조선시대 최고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데 있었다. 국왕과 왕비의 복식 자체에 새겨진 문양과 화려한 색채들은 단순히 미적인 감각만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며, 문양에 나타난 상징성은 국가와 왕실의 권위를 뒷받침해주며, 색채에 반영된 음양오행사상은 최고 권위자의 절대적인 지위를 보여준다. 본 장에서는 국왕과 왕비의 법복(法服:중요한 의식 때 입는 복식)과 의대(衣:갖추어 놓는 의복)를 중심으로 궁중 복식의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①국왕과 왕비의 혼례복과 색채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는 대전법복(大殿法服) 항목에 국왕이 착용할 복장으로 면복(冕服), 평천관(平天冠), 적말(赤襪), 적석(赤潟), 강사포(絳紗袍), 원유관(遠遊冠)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국왕의 의복은 가례 때의 육례에 마다 착용하는 옷이 달랐다.
면복은 ‘국왕이 조회를 보거나 종묘 사직 등에 제사를 지낼 때 입었던 옷이다. 육례의 경우 국왕은 납채, 고기, 친영, 동뇌의 의식 때 면복을 입었다. 면복은 전설상인 인물인 중국의 黃帝가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황제는 중국 전설 속의 삼황제 중의 한 사람으로 의복, 배와 수레, 활과 화살을 처음 만든 문명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이러한 황제가 만든 의복인 면복을 착용한다는 것은 신성함과 권위를 한껏 상징하는 것이다. 면복은 고려시대 공민왕이 몽고에 대한 자주운동을 전개하면서 몽고복을 혁파하고 명나라 관제를 따르면서 명나라로부터 사여받은 이래로 조선시대에도 국가의 중요 행사에 착용되었다.
면복은 대개 면류관, 곤복(장복), 상(裳), 중단(中單), 폐슬(蔽膝:궁중유물(빛) 폐슬 사진), 혁대, 패옥, 대대(大帶), 수(綏), 말석, 규(圭으) 등로 구성되었다(그림24, 25 면복 자료사진) 수는 예복을 입을 때 허리 뒤에 달아 늘이기 위해 색실로 짜서 대대에 매단 것이며, 말은 붉은 색의 버선, 석은 붉은 색의 신발을 의미하며, 규는 면복을 입고 손에 들던 물건으로 위는 뾰족하고 아래는 네모지게 만든 긴 관으로 왕은 청색옥을 사용하였다.
면류관은 면복을 입을 때 쓰는 관으로서 면판의 겉은 검정색, 안은 붉은색으로 되어 있으며 앞면이 뒷면보다 약간 숙여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면판의 앞뒤에는 구슬이 달려져 있는데 중국의 천자가 12류를 단 데 비하여 조선의 국왕들은 9류로 하고, 앞 뒤 모두 18개의 구슬을 달았다. 매 류마다 9개의 옥이 있었으며, 옥의 빛깔은 붉은색,흰색,푸른색,금색,검은색의 5채색이었다. 귓가 옆에는 옥진(귀막이)을 늘어뜨렸는데 이것은 귀가 너무 밝은 것을 경계하는 의미에서였다고 한다


곤복 역시 중국의 천자가 12장복인데 비하여 우리나라에서는 9장복을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종대에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황제를 칭하면서 12장복을 착용하게 되는데, 대한제국의 선포는 왕실의 복식에도 변화를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곤복과 함께 혼인 예복으로 사용된 의복으로 강사포가 있다. 국왕은 납징, 책비의 의식 때 강사포를 입었는데, 강사포는 흔히 조복(朝服)이라고도
불렸다. 강사포 착용시에는 원유관을 쓰므로 원유관포 또는 원유관복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복제에서 비롯되었으며, 우리나라에는 고려말 공민왕 때 명나라로부터 조복으로 사여받은 이래로 정착되었다.
원유관은 검은색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18개의 오색 구슬이 앞 뒤 각 9개씩 달려 있었다. 금비녀를 꽂았으며, 황색,푸른색,백색,붉은색,검은색의 오색 구슬을 앞 뒤 각 9옥씩 18개 장식하였다. 강사포의 구성은 포(袍), 상(裳), 중단, 폐슬, 대대, 패옥, 수 말, 석 등으로 구성되어 면복의 경우와 같았다. 다만 포와 상은 붉은색 비단으로 하였고 문양이 없다는 것이 면복과의 차이점이다.
국왕은 혼인의 마지막 의식에 해당하는 동뇌연을 마치면 원유관, 강사포 대신에 평상복에 해당하는 익선관과 곤룡포로 갈아 입었다. 만원권 지폐를 통해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세종대왕이 바로 익선관을 착용한 모습이다 (영조가 익선관을 착용한 모습)
국왕과 왕비가 혼례식에 갖추었던 예복을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② 국왕의 혼례복
* 대전법복(大殿法服: 국왕의 의례복)
면복 1건, 평천관 1건, 적말 1건, 적석 1부
강사포 1건, 원유관 1부, 적말 1건, 적석 1부.
* 의대
유철릭 1감: 초록토주(草綠吐紬) 1필, 안감 반홍정주(磻紅鼎紬) 1필
유과두 1감: 백토주(白吐紬) 1필, 안감 백정주(白鼎紬) 1필
곁주름 1감: 백토주(白吐紬) 1필, 안감 백정주(白鼎紬) 1필
장삼아 1감: 백정주 1필
단삼아 1감: 백정주 1필
핫바지 1감: 백토주 1필
홑바지 1감: 백정주 1필
말총두건 1부
말총망건 1부
흑궤자피화 1부: 백양모정(白羊毛精:백양 털로 만든 신발 창)을 갖춤
흑사피화 1부: 백양모정을 갖춤
흑웅피삽폐 1부
③ 왕비의 혼례복

왕비의 혼례복 중 가장 화려한 맛을 풍기는 의복은 적의(翟衣)이다. 적의는 가례의 절차 중에서 책비례를 행할 때 입었던 옷으로 조선시대 최고 신분의 여성을 상징하는 복식이었다. 적의는 꿩무늬를 수놓은 포를 말하는 것으로 꿩무늬는 친애해로(親愛偕老)를 상징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왕비가 법복으로 적의를 착용한 것은 고려 공민왕대에 중국에서 관복을 보내온 데서 유래한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 중국에서 처음 적의를 받아들였고 인조 때 우리식으로 옷이 바뀌어서 붉은색의 적의를 만들어 입다가 고종 때는 황제비가 입던 푸른색 적의로 바뀌게 되었다.
왕비의 복식도 유행을 따르고 잇었던 것이다. 조선후기까지 왕비의 적의는 대홍색의 비단으로 만들었으며, 흉배로서 금색 실을 수놓은 5조룡보를 붙이고 적의를 9등분하여 꿩 무늬를 수놓았다. 적의에는 중단, 하피(적의를 입을 때 어깨의 앞뒤로 늘어뜨리는 것으로 긴 한폭으로 되어서 목에 걸치는 것이다), 상, 폐슬, 대대, 혁대, 패옥, 수, 말, 석, 규 등이 갖추어졌다. 적의를 입었을 때는 패옥을 달고 백옥의 규를 들며 대를 둘렀다. 버선(말)과 신발(석)은 붉은색으로 갖추었다.
적의가 왕비의 대례복이라면 왕비의 소례복으로 착용된 옷은 원삼이었다.
세종대학교박물관 소장
원삼은 사금단(紗金緞)으로 홍색의 용무늬 스란치마와 같이 입는데 앞에는 청색의 스란 웃치마를 입었다. 원삼은 소매가 길고 넓으며 소매 끝단에는 넓은 한삼이 봉재되어 있다. 원삼에는 큰 머리를 하는데 어여머리라 하여 다리를 사용하거나 나무로 만든 어여머리를 쓰기도 하였다. 왕비의 평상복은 당의였다. 당의는 조선초의 단배자(短背子)에서 나온 것으로 양옆이 터지고 길이는 엉덩이 정도로 내려와 평상복 저고리와 유사한 형태이다. 당의에는 대개 용첩지를 쓰고 머리는 쪽을 지고 봉잠을 꽂는다. 평상복은 일반 서민의 복식과 거의 같되 색이나 직물의 질에서 차이를 보였다. 가례시에는 특히 단저고리를 입었는데, 이것은 청색 계통의 바탕에 홍색 금선을 댄 저고리로 왕비의 가례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것이었다.

2) 혼례복에 담긴 음양오행사상
조선시대의 혼인 의복에서 또 하나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복식의 색에 나타난 음양오행사상이다. 음양오행사상은 추상적인 사상에만 그치지 않고 조선시대의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의복의 색채 또한 음양오행사상이 생활에 반영된 결과이다. 음양오행사상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색채는 청(좌),백(우),적(남),흑(북),황(중앙)이다. 복색에서는 오색을 정색으로 하고 정색간의 배합에 의하여 만들어진 색으로서 벽(碧),녹(祿),유,자(紫),홍(紅) 등의 간색을 적절히 안배하고 있다. 『예기』에는 ‘의(衣:웃옷)에는 오색의 정색을 쓰고 상(裳:치마)에는 간색을 쓴다’고 하였는데 의는 위에 있어서 양이고 상은 아래에 있어 음이기 때문에 간색을 쓴다는 것이다. 정색과 간색은 양음, 귀천의 사상과도 통하는 것이다.
혼례복에서는 구체적으로 오행사상이 적용된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면복은 장복을 흑색으로 하고 상과 폐슬 등을 훈(적색에 대한 간색)으로 하여 오행의 정, 간색에 의 한 착용방식을 따랐다. 면복 착용에서 신체의 제일 윗부분에 쓰는 면관을 흑색으로 하고 제일 아랫부분인 발에 신는 버선과 신을 홍색으로 한 것 또한 음양관계를 고려한 것이다.
한편 천자는 정색을, 왕은 간색을 착용한다는 관념이 조선시대의 복색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국왕이 강사포의 경우 중국의 입장을 고려해 정색에 해당하는 적색이 아닌 간색인 다홍색을 입은 것이 그러한 예이다. 이런 점에서 고종대 왕비의 혼례복인 적의의 색깔 변화는 주목된다. 적의는 조선후기까지도 간색인 다홍색 적의를 입었으나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난 후에 정색인 청색으로 바귀었다. 이제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황제를 칭한 고종의 의지가 복색에도 변화를 가져왔던 것이다.
활옷 속에 입는 다홍색 치마에 노랑색 삼회장 저고리는 모든 것이 흙에서 성장된다는 원리를 생(生)과 성(成)에 바탕을 두어 미혼 여성의 예복의 색으로 정하였다. 예복에 있어서는 겉감과 안감이 달랐는데 대례복의 경우는 다홍 거죽에 다홍 안이었고 내복은 연두 거죽에 다홍 안이었다. 왕비의 평소복이나 일반 부인의 예복으로 노랑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를 착용한 것은 노랑색(양)과 남색(음)이 상극을 이루는 색의 배합이지만 자색으로 선을 된 노랑색 삼회장 저고리를 입음으로서 상생을 이루었다고 한다. 혼례는 인간사에 있어서 음양의 합일 의식으로 볼 수 있으며 혼례 복식에서의 현훈, 적치(赤緇), 청홍 등 두 색의 결합은 붉고 푸른 가시적 색채와 함게 천지라든가 남녀의 결합 같은 음양오행사상에 의한 개념적 색채 표현이라 할 수 있다. 5)
<왕비가 혼례식에 갖추었던 예복의 구성>
① 중궁전법복(中宮殿法服: 왕비의 의례복)
적의(翟衣) 1감: 대홍광직(大紅唐織) 35척, 안감 대홍광직 5척 5촌
폐슬(蔽藤) 1감: 대홍광직(大紅唐織) 1척 5촌, 대홍향직(大紅鄕織)으로 대용, 안감 대홍사(大紅絲) 2척
대대(大帶) 1감: 초록광직 6척
대홍광직: 반폭 6척, 대홍향직으로 대용, 안감 백라(白羅) 반폭 6척
수(綬) 1감: 금의향직(錦衣鄕織) 1척 6촌
하피) 1감: 모단(冒緞) 6척
상전삼후사(裳前三後四) 앞이 세 폭, 뒤가 네 폭으로 된 치마.
감: 남광직(藍廣織) 34척, 안감 백방사주(白方紗紬) 24척
수(繡) 1감: 대홍광직 5척 5촌, 대홍향직으로 대용
면사(面紗) 1감: 자적라(紫的羅) 9척
적말(赤襪) 1감: 대홍광직 3척 5촌, 대홍향직으로 대용
적석 1부: 진주(眞珠)는 제외함
왜주홍칠함 1부
② 의대
겸장삼 1감: 대홍광직 1필
개오 ‘오’는 도포 또는 두루마기류로 긴 것을 포라 하고, 짧은 것을 오라 함.
1감: 대홍광직 30척
경의(景衣) 왕비나 왕세자빈이 입는 예복의 일종.
1감: 남광사(藍廣紗) 12척
겹면사 1감 : 자적광사(紫的廣紗) 10척
수사기(首紗只:댕기) 1감 : 자적라(紫的羅) 4오리 길이 2척 4촌, 넓이 1촌
곶의(串衣:고쟁이) 1감 : 초록토주 1필, 안감 대홍수주(大紅水紬) 1필
유저고리 1감 : 초록토주 1필, 안감 반홍정주 1필
겹저고리 1감 : 자적초 16척, 안감 대홍수주 1필
유호수 1감 : 자적토주 1필, 안감 반홍정주 1필
겹치마 1감 : 대홍광직 1필, 안감 백정주 1필
유치마 1감 : 남광직 1필
세수장삼(洗水長衫) : 초록정주 1필
노의대(路衣帶) 1감 : 자적라 6척 7촌
자초립 1감 : 자적초 1척 5촌
겹너울 1감 : 자적라 8척 5촌 안감 자적초 6척
흑웅피화온혜(黑熊皮化溫鞋) 1부
각양 의대를 쌀 보자기 감 : 대홍주 2필
왜주홍칠 의대함 : 4부
체발 : 10단
흑칠함: 1부, 흑각장잠(黑角長簪) 2개, 흑각대잠 5개, 흑각중잠 5개,
흑각독소잠(黑角禿小簪) 4개, 흑각차소잠: 3개, 흑각소소잠: 5개
의궤에 나타난 자료를 통해서 왕과 왕비가 가례 때 사용된 혼례복을 일괄적으로 파악할 수 있으며, 각 복식 및 장식품에 소용된 재료와 그 크기를 알아 볼 수 있다.또한 혼례복의 재료에 관한 규정에서도 영조가 추구한 사치방지 의지가 곳곳에 나타난다. 중국산 비단 대신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옷감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라든지, 적석에 진주 사용을 금한 것은 이러한 예로 볼 수 있다.
3) 궁녀와 내관의 의복과 색채
한편, 국왕과 왕비의 법복과 의대를 기록한 다음에 행렬에 참여한 사람들의 복장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특히 이제껏 우리 역사에서 소홀히 되었던 상궁이나 시녀, 나인, 내관 등의 복장과 의장품들이 기록된 것이 흥미를 끈다.

궁녀는 왕족을 제외한 궁중의 모든 여인들을 총괄하는 용어로, 궁중의 여관으로 궁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內人이라 하였다(읽을 때는 나인이라 함). 이들은 모두 대전과 내전 및 왕세자 궁에서 시녀로 봉사하는 여자들이었다. 이중 가장 위가 상궁인데, 상궁의 우두머리인 제조상궁쯤 되면 그 세력이 영의정을 능가할 정도였고, 남자라도 아래 직급에 있으면 '~하게'라고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외에 궁중 각 처소에서 청소일을 담당한 무수리, 궁중의 내의원에 소속되어 의료 업무에 종사한 의녀 등이 궁녀의 구성원이 되었다. 궁녀는 대개 가장 어린 경우 4~5세에 궁에 들어왔으며, 대개는 12~13세에 궁궐로 들어왔다. 궁녀는 원칙적으로 종신제였으며,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 머리에는 개구리첩지를 단 제복을 입었다. 궁녀들은 방대한 궁궐의 안방살림을 도맡아 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드라마 상에서 항상 분주하게 움직이는 궁녀의 모습을 접할 수 있는데 그만큼 궁녀들의 일상은 빡빡한 일정으로 채워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궁녀와 함께 궁중 업무를 담당한 주요 인물이 내시이다. 우리는 TV 드라마 등을 통하여 내시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내시도 엄연히 품계와 관직이 있는 벼슬아치의 하나에 속한다. 이들의 품계는 종2품인 상선(尙膳), 정3품인 상온/상다/상약에서, 종9품인 상원(尙苑)까지 직책이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내시의 관청인 내시부 또한 조선시대의 다른 관서처럼 궁궐밖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서울 북부의 준수방 지금의 경복궁 인근에 위치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궁궐 안에도 내시들이 업무를 보는 관청이 있었다. 이곳이 내반원(內班院)이다. 내반원은 국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내시의 업무 성격상 왕이 계시는 내전 바로 앞에 자리잡고 있었다. 내시는 국왕의 최측근에서 온갖 업무를 수행한다는 점에서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직원과 가장 가깝다. 『경국대전』에는 내시의 임무에 대해 ‘궁궐 안의 음식물을 감독하고 왕명을 전달하고, 궐문을 지키고 청소하는 임무를 담당한다’고 규정하여 내시의 임무가 크게 네 가지임을 설명하고 있다. 궁궐에서 일하는 내시의 숫자는 『경국대전』에 140명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대전통편』에 가서는 그 수효가 일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왕의 뜻에 따라 정하도록 변동이 된다. 내시의 근무 형식은 비교적 장기간 궁궐에 머물면서 근무하는 방식(장번), 교대로 궁궐을 출입하면서 근무하는 방식(출입번)이 있었다.9)
혼례식에 입었던 이들 궁녀와 내관들의 복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상궁 4인의 복장
단장삼 4감: 아청사 각 23척 5촌
겹저고리 4감: 초록주 각 26척 2촌
유치마 4감: 남정주 각 1필
장차마 4감: 홍주 각 1필
말군10) 4감: 백정주 각 1필
활한삼아(闊汗衫兒)11) 4감: 백저포 각 28척 2촌
대(帶) 4감: 남사(藍紗) 각 반폭 8척
너울 4감: 조라 각 7척
양이엄(凉耳掩) 4감: 모단(冒緞) 각 1척 2촌 5푼
② 시녀 4인, 유모 1인의 복장
흑장삼(黑長衫) 5감: 흑저포 각 1필 7척
겹저고리 5감: 초록주 각 21척
유치마 5감: 남주 각 1필
장치마 5감: 홍주 각 28척
말군 5감: 백정주 각 1필
활한삼아(闊汗衫兒) 5감: 백저포 각 28척
대(帶) 5감: 남사(藍紗) 각 반폭 8척
너울 5감: 조라 각 12척
양이엄(凉耳掩) 5감: 모단(冒緞) 각 1척 2촌 5푼
③ 기행 나인(騎行內人) 4인의 복장
홍장삼(紅長衫) 2감: 대홍저포 각 1필 17척 5촌
황장삼(黃長衫) 2감: 황저포 각 1필 17척 5촌
겹저고리 4감: 초록주 각 26척 2촌
유치마 4감: 남주 각 1필
장치마 4감: 아청 각 1필
말군 4감: 백정주 각 1필
삼아(衫兒) 4감: 백정주 각 26척 2촌
대(帶) 4감: 남사(藍紗) 각 반폭 7척
너울 4감: 조라 각 12척
양이엄(凉耳掩) 4감: 모단(冒緞) 각 1척 2촌 5푼
④ 보행 나인 4인의 복장
겹저고리 4감: 초록주 각 26척 2촌
장치마 4감: 홍주 각 1필
단치마 4감: 백주 각 1필
유치마 4감: 남주 각 1필
삼아 4감: 백정주 각 26척 2촌
양이엄 4감: 모단 각 1척 2촌 5푼
⑤ 귀유치(歸遊赤) 내관 20인의 복장
홍주의(紅紬衣) 10건
자적주의(紫的紬衣) 10건
감투(敢頭) 20건
다회(多繪) 20건
두석토환(豆錫吐環)12) 20건
흑단운혜(黑緞雲鞋) 20부
청목행전(靑木行纏) 10건
위에서 궁녀와 내관의 복장을 의궤에 기록된 대로 정리해 보았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나인 중에서도 말을 타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말을 탄 사람의 복장은 보행하는 사람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기행 나인 2명은 홍색 장삼을, 2명은 황색 장삼을 착용한 것과 귀유치 내관 20인 중 10명은 홍색 옷을 10명은 자색옷을 입게하여 통일성과 함께 색채의 다양성을 꾀한 모습 또한 흥미롭다. 그리고 여성인 만큼 여성의 얼굴이나 신체 일부를 가릴 수 있는 장비가 상당수 발견된다. 행렬의 여인 중에서는 신체를 가리는 장비인 너울이나 장옷을 입은 여인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너울은 모자를 쓰고 그위로 얇은 천을 뒤집어 쓰는 것이고, 장옷은 맨머리에 쓸치마를 뒤집어쓰는 것으로서 착용방법이 다르다. 여성이 얼굴을 가리는 모습은 특히 중동지방에서 두드러진 풍습으로, 현재까지도 서역의 여인들이 차도르를 두른 모습은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통에서도 여인들이 얼굴을 가렸던 풍습이 고려시대부터 이어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인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당시 개경의 모습을 기록한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는 책의 부인(婦人) 항목에는 고려 여인들이 얼굴에 쓰던 몽수(蒙首)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고려 여인들은 크게 화장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검은 색 얕은 턴 세 폭으로 길이가 여덟자 되게 만들어 뒤집어 썼는데 눈과 얼굴만 내 놓았다'
고려 여인들이 썼다는 이 몽수가 바로 너울의 전신이었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고려시대의 몽수는 여덟자나 될 만큼 그 길이가 길었다.
왕실 혼례의 모습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에서 뿐만 아니라 부녀자를 주 소재로 삼은 신윤복의 그림에서도 너울을 쓴 여인이나 장옷을 입은 여인의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자료:신윤복의 말 탄 여인의 그림) 너울과 장옷은 조선시대에는 1412년(태종 12)에 부녀자 외출시에 얼굴을 가리라고 하여 한층 더 보편화되었는데 가난한 아녀자들은 삿갓을 대신 쓰고 다니기도 하였다.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너울을 한동안 너불(汝火)이라고 쓰다가 후기에 이르면 너울(羅兀)로 표기하였다고 한다.(신영훈, 『우리문화 이웃문화』 참조)
왕비 또한 너울을 사용한 것으로 나타난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겹너울을 만드는데 사용한 재료가 나타난다. 자적라(紫的羅) 8척 5촌, 안감용의 자적초 6척, 끈을 만드는데 사용된 자적라(紫的羅) 1척 2촌, 매듭감 대홍진사(大紅眞絲) 1냥 5전, 금전지 3반, 속에 넣을 향사(鄕絲) 3돈, 바느질용 자적진사 1돈이 들어간 것으로 나타난다. 너울의 주재료는 자색의 비단이었으며, 각 부분마다 매듭과 장식이 있었다. 이처럼 의궤에는 소용된 재료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현재에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전통시대의 물품들을 복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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