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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례(五禮)의 운영과 궁중행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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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를 국치의 이념으로 삼은 조선왕조에서 정치사상과 윤리사상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두 사상을 연결시켜 주는 것이 바로 ‘예(禮)’라는 규범이다. 국가의 조직과 질서는 예를 핵심으로 하는 예제(禮制)에 의해 통괄되었으며, 이를 이끌어나가는 관료층의 사상과 가치관도 예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궁중행사도의 제작 배경에는 이 두가지의 측면이 모두 유기적이고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즉 예의 윤리 도덕적인 기능에 기반을 둔 관료들의 가치관은 궁중행사도의 제작에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으며, 실제 제작에서 요구되는 도상(圖像)의 결정은 전적으로 예제에 의존하였다.
유교에서 예는 정치·법률·도덕 등 인간 생활과 문화 전반에 걸쳐 작용한다. 예는 유교의 정치 이념이며, 유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정치적 이념은 ‘예치(禮治)’가 된다.
‘예(禮)’자가 제기(祭器, 豆) 위에 제물[曲]을 올려 둔 형상을 나타내는 ‘풍(豊)’과 하늘이 형상을 드리워서 길한 것과 흉한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 준다는 의미의 ‘시(示)’가 결합된 글자의 형태[字形]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예의 본질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종교적 신성의례(神聖儀禮)에서 비롯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종교적인 예에서 세속적인 예가 분화되었고, 예의 개념도 사회의례 혹은 질서의 뜻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는 공자(孔子, BC. 551-479)가 활동하던 시대가 되면 일상생활에서는 인간의 욕구를 조절하고 행동규범을 관장하는 개인의 윤리적인 기능이 부각되었고, 아울러 국가의 질서를 바로잡는 정치적인 면에서도 효용성을 갖게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방편, 즉 정치의 원리가 되었다. 일상의 윤리규범과 국가의 조직 규범이라는 두 가지 기능에 관계하게 된 예는 한대(漢代)에 유교가 중앙집권적 관료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등장하자 정치적인 기능이 더욱 강조되었다.
그런데 예의 기준 규범은 시대와 역사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구체적인 형식과 내용에서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이를테면 오례라는 국가전례의 체계를 공유하더라도 시대나 국가에 따라 그 적용 범주가 다르고 내용이 변하는 것이다. 예의 근본적인 정신은 불변하지만 형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가변성을 예(禮)의 두드러진 특성중의 하나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예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인성(人性)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본 공자가 예의 근거를 인간의 본질에 두고 예를 고정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은 데서 비롯되었다.
예(禮)는 처음부터 정치적인 요구에서 시작하였으므로 조정(朝廷) 중심, 통치자 중심의 의례로 발전해 나갔다. 유교국가에서 제도와 전례는 예(禮)의 근본원리에 입각하여 법제화하는 것이 보통이므로 예(禮)의 윤리 도덕적인 내면화보다는 정치적인 기능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하였다. 바로 이 유교적으로 정비된 국가조직체계가 예제이다. 대개 왕과 왕실을 중심으로 제정되는 예제는 국가체제 및 왕권의 확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인다. 자연히 예제는 최고의 권위와 타당성을 지니는 규범질서로 간주되었고, 국가통치를 위한 각종 제도와 백성의 생활을 규율할 수 있는 효과적인 규범 통제의 장치가 되었다.
중국의 유교사상은 한학(漢學)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삼국시대 초기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우리나라에 수용된 유교사상은 고려시대에 불교와 더불어 국가의 주요 정치 이념으로 수용되었고, 그 유교 이념이 예제에 의한 왕권의 수립과 운영을 가능하게 하였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죽기 전에 후세의 왕들이 지켜야 할 훈요십계조(訓要十戒條)의 제10조에 경학(經學)과 사기(史記)를 나라와 가정의 지침서로 삼고, 무일편(無逸篇)을 그림으로 그려 벽에 걸어 두고 출입할 때에 보고 살필 것을 당부하였다. 또 성종 1년(982)에는 최승로(崔承老, 927-989)가 시무이십팔조(時務二十八條)를 올렸는데,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는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이다(行釋敎者 修身之體 行儒敎者 理國之源)”라며 유학과 불교의 역할에 대해 말한 바 있다. 불교·도교와 함께 유교의 예(禮)가 고려 초기부터 왕권에 대한 명분론(名分論)과 왕실의 정치적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 질서의 기준으로 수용된 것이다.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의 건국자들에게는 고려 말의 사회경제의 모순을 극복하며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하는 한편, 왕권의 교체를 대의명분에 맞게 이념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현실문제가 놓여 있었다. 송대의 성리학은 철학적이면서도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면이 강했으므로 다른 어느 시대의 유학보다 예(禮)를 중요시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수신적(修身的) 성격이 강한 성리학에만 치중하지 않고 한·당의 유학과 불교, 도교 등 전통적인 요소까지 수용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그들은 주나라의 정치를 최고의 이상으로 추구하게 되었으며, 정치·경제·법률 등 거의 모든 분야의 국가조직을 예제화하는데 『주례(周禮)』를 실질적인 모델로 삼았다. 주나라의 예는 사회생활 속의 인간관계부터 통치계급내의 신분관계와 국가의 정치제도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규율하였는데, 이 중에서 국가의 조직체계·직제·의식 등을 정리한 것이 바로 『주례(周禮)』이다.
이렇게 예제화(禮制化)된 국가 조직은 길(吉)·가(嘉)·빈(賓)·군(軍)·흉(凶) 다섯 개의 주제로 분류되는 오례(五禮)라는 의례 체계를 통해 실질적으로 행용(行用)되었다. 오례라는 체계는 『주례(周禮)』에 기인한 것으로써 왕권의 위상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에 국가를 다스리는 근본원리를 유교로 한 국가에서는 언제나 채택되었다.

오례중에서 궁중행사도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부분은 바로 가례(嘉禮)이다. 현재 전하는 궁중행사도의 내용은 대부분이 예연(禮宴), 사연(賜宴), 친림사연(親臨賜宴), 진하(陳賀), 책봉(冊封), 어첩봉안(御帖奉安), 과거(科擧) 등 가례에 직접적으로 해당되거나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 밖에는 길례에 해당하는 종묘제례(宗廟祭禮)·문묘알성(文廟謁聖)·능행(陵幸) 등이 있고, 군례(軍禮)에 해당하는 대사례(大射禮)를 그린 그림이 있지만 매우 작은 비중을 차지한다. 빈례(賓禮)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궁중행사도와는 다른 제작 경로를 통해 사신 접대용으로 그려진 ‘영조도(迎詔圖)’와 ‘근정전청연도(勤政殿請宴圖)’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사실 오례중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으뜸으로 여겨졌던 것은 제사의 예인 길례이며, 이 점은 오례의 순차에서 『주례(周禮)』이래 언제나 제일 처음에 위치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궁중행사도에서는 길례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그만큼 적극적인 표현의 대상으로 부각되지 못하였다.
반면 궁중행사도의 주요 대상이 가례와 관계있었던 것은 가례가 갖는 친목화친(親睦和親)의 상징성과 궁중행사도의 제작 동기가 서로 부합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주례(周禮)』「춘관종백(春官宗伯)」에 의하면 가례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례는 만민(萬民)을 친하게 한다. 식음(食飮)의 예로써 종족과 형제를 친하게 하고, 혼관(婚冠)의 예는 남녀를 친하게 한다. 빈사(賓射)의 예는 고구(故舊 : 사귄지 오래 된 친구)와 붕우(朋友 : 친구)를 친하게 하며, 향연(饗宴)의 예는 사방의 빈객을 친하게 한다. 신번(사직이나 종묘에 제사지내는 날고기)의 예는 형제의 나라를 친하게 하며, 하경(賀慶)의 예는 이성(異姓)의 나라를 친하게 한다.

즉 가례의 목적은 만민을 서로 가깝게 하기 위한 것이며, 식음례, 혼관례, 빈사례, 향연례, 신번례, 하경례의 여섯 항목으로 세분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식음례는 인군(人君)이 음식의 예와 음주의 예로 종족형제들을 친하게 한다는 것으로 연회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혼관례로 혼례(婚禮)와 관례(冠禮)를 말하며, 혼인은 예의 근본이고 관례는 예의 시작임을 뜻한다. 세 번째는 빈사례이다. 사례(射禮)에서는 왕이라 하더라도 빈주(賓主)를 세우게 되는데, 빈주는 왕의 오랜 친구[고구 : 故舊]로서 세자때 함께 공부한 사람[붕우 : 朋友]이라는 뜻이다. 네 번째인 향연례에서 빈객(賓客)은 조빙자(朝聘者)를 말한다. 종족 형제에게는 다만 음식의 예만으로 친함을 나타낼 수 있지만 사방의 빈객은 풍성한 향연의 예로 공경함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의 신번례에서 신번은 사직과 종묘의 제사에 올리는 고기를 의미한다. 선왕(先 王)을 함께 모시는 형제의 나라들에게 이 제물을 나누어 주어 친하게 하는 의식을 말한다. 여섯 번째는 하경례로 왕실의 외척인 이성의 나라에 대해서는 형제의 나라와 다르기 때문에 반드시 문사(文辭)로써 뜻을 전달하는 하례(賀禮)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가례의 정의와 분류에서 ‘가(嘉)’는 선(善)한 것이고 사람의 마음이 선하기 때문에 가능한 제도가 가례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다. 만민이 친목하고 화합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선한 마음이 우선적으로 갖추어져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길·빈·군·흉례와는 달리 가례에서는 만민이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지칭하는 만민이란 왕실에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사회계층을 포함하는 개념으로 왕이 주인 역할을 하여 상하(上下)가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점이 바로 가례가 오례의 나머지 길·빈·군·흉례와 구별되는 특징중의 하나이며, 이런 이유로 가례만이 왕과 서민이 모두 공유할 수 있는 통과의례(通過儀禮)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다.
『주례(周禮)』의 가례 분류가 시사하듯이 실제로 가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많은 의식은 연향(宴享)을 수반한다. 연향에서 ‘연(宴)’은 낙(樂) 또는 합음(合飮)을 뜻하며, ‘향’은 헌(獻)을 의미한다. 연향은 가례의 중요한 항목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 비록 의주(儀註)에 연향이 명시되어 있지 않더라도 경하(慶賀)하는 의미에서 관례상 연향이 수반되는 예가 많은 것이다. 가례에서 연향이 유난히 강조되는 것은 음식을 나누는 자리를 통해 ‘만민화친(萬民和親)’이라는 가례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주자(朱子)가 말한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왕과 군신 사이에서 연향이 지니는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왕과 신하 사이가 근엄과 존경만으로 일관하다 보면 정(情)이 통하지 않아 서로 도움이 되는 충고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을 차려 두고 서로 모이는 기회를 갖기 위해 잔치하고 음식을 권하는 예를 만들어 상하의 정이 통하게 하고 은근한 정이 붙도록 하는 것이다.
『고려사』「예지」의 가례, 『세종실록』「오례」의 가례, 『국조오례의』의 「가례」, 『국조속오례의』 및 『국조속오례의보』의 「가례」, 『춘관통고』「가례」의 각 항목을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면 예전(禮典)에서 가례가 과연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대에 따라 적응하면서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지 알 수 있다. 왕조의 교체 혹은 시대 상황에 따라 현실적으로 달라지는 정치적인 요구를 수용해야 했으므로 가례의 속성과 개념을 벗어나지 않는 한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변화하였다.
궁중행사도는 국가 행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기 때문에 세부적인 도상은 이러한 예전과 의궤에 따라 결정된다. 예전이나 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의주는 행사 장소의 설비, 참석자의 위차, 의식의 절차 등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궁중행사도의 도상 해석에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궁중행사도의 주제는 진찬(進饌)·진연(進宴)·사연·양로연·기로연(耆老宴) 등 연향을 중심으로 진하, 책봉, 과거의 방방, 입기사(入耆社), 왕세자의 서연(書筵)과 입학 등에 편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궁중행사도의 제작 주체가 왕이 아닌 관료들이었다는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임금과 한자리에서 어울릴 수 있다는 돈독한 군신 관계와 왕을 보필하는 절대적인 신료 관계의 영광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어느 의례보다도 연향이 강조되는 가례가 적합하였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궁중행사도가 가례에 집중되어 제작된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특히 궁중행사도의 상당수가 연향도(宴享圖)와 사연도(賜宴圖)인 점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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