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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청 요계(僚契)의 성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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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후 우리나라에는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계를 조직하는 관습이 유행하였다. 계를 결성하는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계속되었으며, 특히 조선 초기부터 대부분의 관청에는 소속 동료들끼리의 모임인 요계(僚契)가 형성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기로들의 모임인 최당(1135-1211)의 해동기로회(海東耆老會)가 있었는데, 이 모임은 이후 기로들과 문인들이 결계(結契)할 때 전거가 되었다. 이 밖에도 유자량(庾資諒, 1150-1229)이 조직한 기로회와 유가(儒家) 자제들의 문무계(文武契)에 대한 기록들은 고려시대 문인들 사이에 계의 결성이 유행했음을 알려 준다.
고려시대 말엽에는 기로회나 문인계회 이외에 소속 관청이나 관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계가 초기 형태로 상당수 결성되어 있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한(文翰)을 담당한 대표적인 학자였던 쌍매당(雙梅堂) 이첨(李詹, 1345-1405)의 문집인 『쌍매당선생협장문집(雙梅堂挾藏文集)』에 수록된 여덟 건의 계 서문을 통해서 고려시대 말엽 요계 결성의 일면을 잘 알 수 있다. 이첨이 직접 참가했던 삼익계(三益契), 충신계(忠信契), 권선계(勸善契), 논취계(論取契), 우인계(友仁契), 병오갑계(丙午甲契), 향당계(鄕黨契)와 이첨이 계원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1400년경 60여명의 좌명공신(佐命功臣)들이 결계할 때 그가 서문을 쓴 은신계(恩信契)가 바로 그것이다. 학문적 동료들이 결성한 삼익계와 논취계를 제외하고는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할 때 동료 학생들과 맺은 우인계, 1366년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함께 합격한 동료들과 결성한 병오갑계, 어떤 관청인지 알 수 없으나 관아의 동료로 구성된 충신계와 권선계, 1384년 정지(鄭地) 장군 막부(幕府)에서 같이 근무한 군 출신들이 모인 향당계처럼 이첨이 관직으로 나가기 위해 학문을 수학하거나 관직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동료들과 결성한 것이다.
서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이들 계회의 성격은 유교적인 덕목의 실현에 설립 취지를 둔 사교계로서의 강한 경향을 띠고 있다. 하지만 계원의 구성만으로 볼 때는 관청 중심으로 모인 구성원들의 관료적이고 동지적인 성격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으므로 요계의 범주 안에 포함된다. 고려 말에 이러한 계회가 존재하였다는 것은 최당의 해동기로회 이후 결계의 풍조가 여러 경향으로 발전하였음을 말해 준다.
우의를 기반으로 하여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결성된 사교계는 상류 지배층이 조직하는 계의 전형적이고 대표적인 형태이다. 위의 고려말 사례에서도 짐작되듯이 요계라 하더라도 처음에는 단순한 친목 모임과 유사한 형태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동료에 대한 강한 의식이나 응집력은 약했으나 계회를 통해 집단의 결속을 강화하는 기능이 수행되면서 조선시대에는 관청 동료간의 결계가 점차 성행하게 되었으며 계원 상호간의 결속력도 한층 강화되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가 되면 육조(六曹)를 비롯하여 삼사(三司), 승정원(承政院), 한성부(漢城府) 등 거의 모든 관청에는 소속 관원들을 계원으로 하는 요계의 결성이 확산되어 있었다. “오늘날 조정의 관리로서 문신은 같은 해에 서사(筮仕)하여 오래 되면 동관(同官)이 있게 되어, 혹은 계를 만들어 교정(交情)을 굳게 하고 있다.” 라는 『성종실록』의 기사가 시사하는 것처럼 한 관청에 봉직하며 같은 임무를 수행한다는 ‘동관’과 ‘동사(同事)’에 의미를 둔 계의 결성이 15세기 무렵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계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배경에는 관료사회에서 동관끼리 공유하는 동류의식은 형제간의 의리로 맺어진 것이라는 전래의 가치관이 한몫을 하였으며, 동관의 의미는 “인정 가운데 가장 친밀하고 돈독한 것[人情之最親篤者]”으로서 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래될수록 더욱 깊어지는 가치로 소중히 여기는 의식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직이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이동이 많아서 오랜 시간동안 헤어진 채 만나지 못하기가 쉬우므로 요계의 계원들은 그 자취를 보존하여 떨어져 있어도 서로 잊지 않는 두터운 도리를 지키기 위해 계회도를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계회도가 그려지게 된 연원과 그 안에서 차지하는 좌목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음에 인용되는 이수광(1563-1628)의 말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릇 동료에는 형제의 의리가 있어서 옛사람들은 이를 중요시하였다. 예전에는 분축(分軸)이 있었는데 오늘날 시축을 만들 때처럼 단지 성과 이름만을 기록하였을 뿐이다. 중간에 마침내 장자(障子)를 만들어 오히려 계축이라 불렀는데, 존년(存年)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요즈음에는 비단 바탕으로 병풍을 만들어 채색 산수를 그리는데 분수에 넘침이 심하다. 대간(臺諫)들이 논평하여 금지하게 함에 이르러도 그치지 아니하니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계를 좋아하는 뜻이 점차로 옛날과 같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관청 동료간의 결계에 대한 기록물은 성명과 관직만을 쓴 두루마리 형식에서 출발하였으며, 계회의 광경을 그린 화축은 나중에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즉 처음에는 성명·관직·본관·생년·등제년(登第年) 등을 기록한 좌목 형식으로 제작한 문서를 나누어 가졌다. 관료가 부임하면 제명(題名)하는 관례에 따라 각 관청에는 제명록, 즉 선생안(先生案)을 구비해 두는 것이 규례였던 것처럼 결계의 자취를 남기기 위한 문서를 만들 때에도 처음에는 제명의 의미가 있는 좌목 형태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그 후 계회도가 담긴 화축을 만들게 된 뒤에도 좌목은 제명록을 대신하여 그 계회의 성격을 구명해 주는 중요한 부분으로서 반드시 뒤따르게 되었다. 계축이라는 명칭도 제목과 좌목을 구비한 계회도의 독특한 화면 구성으로 인해 얻게 된 이름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요계는 관직을 수행하며 동고동락하는 동료들끼리의 강한 결속력, 소속 관청에 대한 긍지, 그리고 왕의 신료(臣僚)로서 선발되었다는 인재 의식 등을 표출할 수 있는 통로로서 인정되었고, 좌목이 반드시 수반되는 계회도는 그러한 의미를 시각적으로 보존하는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앞에서 인용한 이수광의 글은 그가 활동했던 17세기 초 무렵 화축 대신에 병풍에 그림을 그리는 예가 등장하였으며, 계회의 광경을 주로 담았던 계축과는 달리 채색의 산수화가 많이 그려지는 등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17세기가 되면 ‘기로소계병(耆老所契屛)’, ‘상의원계병[尙房契屛]’, ‘형조계병[秋曹契屛]’, ‘승정원계병[銀臺契屛]’, ‘태복시계병(太僕侍契屛)’ 등 관청의 동료들은 도병, 즉 계병을 통해 자신들의 친밀감을 표시하기 시작하였으며, 화축과 도병 외에 화첩 형식도 요계의 기념물로 선택되었음이 문헌에 실려 있는 각종 계회도의 서문이나 찬시를 통해서 입증된다. 그런데 계병은 계축이 계회의 장면을 주로 담았던 것과는 달리 연회 이외의 내용을 더 많이 수용하였던 것 같다.
승정원 계회도의 장황 형식의 변화를 보면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허백정집(虛白亭集)』에 있는 「승정원계축문(承政院契軸文)」이나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의 『동고유고(東皐遺稿)』에 실려 있는 「서은대계축산수족(書銀臺契軸山水簇)」은 15·16세기의 승정원 계회도가 산수 비중이 큰 계축으로 제작되었음을 알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실례로 1534년(중종 29)에 그려진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계축이 현존한다.
그러나 17세기가 되면 계축에 대한 찬시문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청음집(靑陰集)』에 실린 「제은대동료계첩(題銀臺同僚契帖)」,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의 『백헌집(白軒集)』에 있는 「제은대계첩(題銀臺契帖)」, 이민구(李敏求, 1589-1670)의 『동주집(東洲集)』에 수록된 「은대계병서(銀臺契屛序)」 등처럼 계첩과 계병에 대한 글로 점차 대체되는 변화를 알 수 있다.
시대에 따른 계회도의 장황 형식의 변화는 의금부(義禁府) 계회도에 관한 글에서도 엿볼 수 있다. 15·16세기의 기록인 『허백정집』의 「제금오랑계축(題金吾郞契軸)」, 그리고 홍언필(洪彦弼, 1476-1549)의 『묵재집』「제금오계축(題金吾契軸)」, 그리고 최립(1539-1612)의 『간이집(簡易集)』「제금부랑축(題禁府郞軸)」 등은 의금부 계회도가 계축으로 제작되었음을 나타내지만, 『백헌집』에 실린 「제금오랑계첩」은 17세기의 의금부 계회도가 화첩으로 꾸며졌음을 말해 준다. <금오계첩(金吾契帖)>은 1739년에 제작된 고려대학교 박물관본과 1750년에 제작된 규장각본 등 여러 소장본이 남아 있는데 모두 18세기에 제작된 화첩이다. 요계의 계회도가 화축에서 화첩이나 도병으로 바뀌어 가는 현상은 승정원이나 의금부의 계회도에만 국한된 사실이 아니라 전반적인 현상이었으며, 그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 1600년대에 이르러서이다.
계원으로 참여한 관원의 관품(官品)과 계회도의 장황 형식과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에는 육조를 비롯하여 여러 아문(衙門)은 예전부터 모두 낭관(郎官) 계축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당상(堂上)은 참여하지 않았다. 지금 이 제명은 계축에 한 것이 아니라 책자를 이용한 것이며, 당상과 낭료(郎僚)가 하나의 책자에 함께 제명한 것이다. 대개 임진란 후에 일당(一堂)의 요속(僚屬)들이 한마음으로 취합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후일 자리를 떠나더라도 서로 모습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역시 하나의 계축일 뿐이다. 평상시에는 생초를 바탕으로 하여 위에 그림을 그리고 아래에는 관직을 갖추어 성명을 기록하였다. 지금은 이미 나라가 탕패한 나머지 갑자기 이러한 것을 만들기가 어렵다. 만약 어렵다는 것을 핑계로 하지 않는다면 황하의 물이 맑아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과 가깝지 않겠는가. 이것이 이 책자를 만드는 이유이며 그 정(情) 또한 서글픈 일이다.(후략)
위의 글은 15·16세기에는 낭관계가 성행함과 아울러 계축이 유행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는 당상과 낭관이 함께 제명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계축보다 계첩을 선호하였다는 요지의 내용이다.
대부분 관청의 요계는 승정원 승지들의 계회도인 1534년의 <은대계회도>와 사간원(司諫院)의 대사간·사간·정언(正言)의 계회도인 1540년의 <미원계회도>처럼 관직을 가진 모든 관원이 계원이 되거나 당상관 품계를 가진 그 관청의 중심 인물을 위주로 구성되었지만, 일부 관청에서는 관례적으로 5품 이하의 낭관들이 따로 계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특히 15·16세기에는 육조와 한성부, 의금부, 도총부(都摠府) 등 많은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하급 관료인 낭관들끼리 모인 낭관계회가 크게 유행하였다. 또 선전관청(宣傳官廳)의 3품 이하 관원인 선전관들이 선전관계회를 만들었으며, 때로는 오위(五衛)의 정 7품 관직인 사정(司正)들만의 계가 결성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품(流品)이 엄격하게 구분되던 때였으므로 이렇게 유품이 같은 관원끼리 계를 결성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한 관청 안에 여러 개의 계가 존재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경향이 궁중행사도의 제작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조선 초기 요계의 성행과 낭관계회의 유행은 현재 남아 있는 이 시기 계회도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낭관계회도로는 1541년(중종 36)경에 제작된 병조의 <하관계회도(夏官契會圖)>와 1550년(명종 5)경의 작품인 호조의 <호조낭관계회도>가 전한다.
이 밖에도 사옹원(司饔院) 당하관(堂下官) 이하 관원들의 1540년경의 모임을 그린 <사옹원계회도>와 1586년(선조 19) 통례원(通禮院)의 6품관인 인의(引儀)·겸인의(兼引義)·가인(假引)만의 모임을 그린 <통례원계회도>가 있다. 이 계회도들이 모두 계축인 점은 16세기 계회도의 주된 장황방식이 역시 계축이었음을 다시 한번 입증한다.
조선 후기에도 관청의 계회도는 전통적인 관습으로 계속되었다. 그런데 계의 규약이나 모습을 남기는 방식에 있어서는 관청마다 애호하는 나름대로의 형식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나타나 있다.

<호조낭관계회도>, 1550년경, 견본담채,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리지어 모여서 음식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을 모두 계라 일컫는다. 동갑인 경우 갑계, 같은 해의 과거 합격이면 방계, 그리고 같은 관청인 경우 요계라고 부르며, 홍문관(弘文館)에서는 계병(契屛)을, 승문원(承文院)에서는 계첩(契帖)을 만든다. 이 풍습이 전해져 향촌에서 금전을 갹출하는 것 역시 모두 계라고 이름한다.
계회도를 만들 때 홍문관은 병풍을 , 승문원에서는 첩자를 선호하였던 것 같은데, 현재로서는 이러한 차이를 입증할 만한 유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아무튼 각 관청별로 계원들은 습관적으로 즐겨 사용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형식은 각 관청의 전통이 되어 유지되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소속 집단의 일체감이 강조되는 청계(廳契)나 요계 외에도 관직과 관련하여 공통점을 가진 몇몇 동료끼리 결계하는 일도 잦았다. 예컨대 15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비슷한 시기에 대과(大科)에 합격하여 각 관청에서 봉직했던 일곱 명의 관원들이 조직한 계회를 그린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의 경우가 그러하다.
또 중시(重試)를 통해 경재(卿宰)가 되어 일시에 한성부에서 판윤(判尹)·좌윤(左尹)·우윤(右尹)으로 근무하게 된 세 명의 관원이 계를 조직하여 계병을 만든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기사(大奇事)’로 여기고 그림으로써 기념하고자 한 것이다. 또 이호민(李好閔, 1553-1634)의 『오봉집(五峯集)』에 기록된 「제은대이십삭대루도」는 승정원에 들어가 동료가 된 지 20개월이 되는 관원 두 명이 제작한 그림이다. 여기에는 승정원 관리로서 요구되는 총명한 자질, 체력, 인내력이 필요한 업무의 어려움과 그에 따른 책임감이 잘 나타나 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문무관들은 관직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계회를 만들고 친분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계회도라는 기념화를 제작하여 간직하였다. 계회를 통해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과시하는 한편, 집단 내부의 결속을 다지려는 정치적 의도를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직 또는 공식적인 지위를 갖는 사람들 사이에서 계가 성행한 풍조는 조선시대 관료문벌사회(官僚門閥社會)에서 매우 당연한 현상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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