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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행사도의 여러 양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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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행사도에는 국가 통치와 국정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혹은 교시(敎示)적인 목적에서 평상시에 제작된 그림들과 국가의 특정한 행사를 마친 뒤 일시적으로 결성된 관료 모임의 기념물로써 제작된 그림들이 있다.
관청 요계의 기념화로 제작된 궁중행사도는 왕이 유교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통치의 한 방법으로 평상시에 제작하였는데,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기록은 명종의 특별한 지시로 제작되었던 23폭의 ‘과거도(科擧圖)’에 관한 것이다. 명종은 1563년(명종 18) 과거가 국가의 중대사임을 인식하고 초시도(初試圖)·향시도(鄕試圖)·복시도(覆試圖)·전시도(殿試圖)·별시도(別試圖) 등 각종 문무과시도(文武科試圖)를 비롯하여 과거와 관계있는 의례를 그린 방방도(放榜圖)·사은숙배도(謝恩肅拜圖)·알성도(謁聖圖)·녹명도(錄名圖)·유가도(遊街圖) 등 23폭의 그림을 특별히 제작하도록 명한 일이 있었다. 명종은 이듬해 이 그림들을 23명의 재신(宰臣)들에게 한 폭씩 나누어 준 뒤, 칠언율시 두 수를 지어 비단에 각자 수필(手筆)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여러 종류의 과거와 그에 부수되는 의식을 가리키는 제목으로 보아 장면마다 그 의식의 모습을 한눈에 구별할 수 있는 그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반차도 형식에 가까운 그림이었는지 혹은 사실적인 행사도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그림은 실제로 거행된 특정 행사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국가의 의식 절차를 그림으로 묘사한 것이며, 과시적인 기념물이 아니라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그려진 것이다. 명종은 이 관문을 통과하여 국가의 요직에 이른 재상들에게 이 그림을 나누어 줌으로써 관리 등용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나아가 왕의 권한을 널리 확인시켰던 것이다. 과거도를 그리는 전통은 1664년(현종 5) 함경도 문무과별시(文武科別試)와 방방 장면을 도회한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를 제작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작례를 18세기 이전의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영조 연간 이후에는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영조대에는 ‘친경도(親耕圖)’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영조는 1739년(영조 15) 1월 27일 창덕궁 후원에 있는 어전(御田)에서 친히 논을 가는 의례인 친경례를 행하였는데, 이에 앞서 의주와 절목(節目)을 확정할 때 신하들은 그 내용을 그림으로 그려 올려 왕의 결재를 받았다. 친경에 이어 대신(大臣)과 종신(宗臣)이 짝을 지어 우경하는 순서에서 좌우로 나란히 설 것인지, 앞뒤로 나란히 설 것인지에 관한 사안을 그림으로 그려 놓고 논의를 한 것이다. 영조는 친경을 마친 뒤에 그 광경을 그림으로 그려 동궁(東宮)에 내입(內入)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 배경에는 장차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에게 농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고 농사 장려에 솔선하는 모범을 보이려는 뜻이 있었다.
1747년(영조 23)의 친림관예(親臨觀刈) 때에도 병풍이 만들어졌으며, 그 뒤를 이어 1781년(정조 5) 친예 때에도 앞선 예에 준하여 그림을 그려 내입하였다. 다른 행사도와는 달리 왕이 친히 논을 갈고 벼를 베는 그림은 무일도(無逸圖)나 빈풍도와 같은 의미를 부여하여 나라의 근본이 농사에 있음을 상징하는 교훈적인 그림으로 여겼던 것이다.
국가전례의 의주를 시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의식 절차의 윤곽을 회화화(繪畵化)한 궁중행사도로 궁중유물전시관에 <종묘제례도병(宗廟祭禮圖屛)>이 전한다. 사시(四時)와 납일(臘日) 등 일년에 다섯 번 거행하는 종묘의 제사를 왕이 직접 주관하는 경우의 의식 절차를 알기 쉽게 그림으로 도해하고, 그 하반부에 해당 의주를 기록한 8첩 병풍이다.
종묘제례를 그린 그림은 정조대에도 그려졌다. 정조는 1797년(정조 21) 사도세자를 모신 경모궁에 전배를 마친 뒤 경모궁향의(敬慕宮享儀)를 그린 8첩 병풍을 완성하였는데, 반면 종묘향의도(宗廟享儀圖)는 그때까지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정조는 이를 안타깝게 여겨 뒤이어 종묘향의도병의 제작을 지시한 것이다. 종묘 제례를 그린 병풍은 이렇게 정조 연간에 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국가전례와 관련된 그림은 중국 사신에 대한 외교용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조선에 왔던 중국사신의 개인적인 요청으로 그려진 ‘근정전청연도(勤政殿請宴圖)’나 ‘영조도(迎詔圖)’가 그러한 경우이다.
‘근정전청연도(勤政殿請宴圖)’는 1537년(중종 32)에 조선에 온 명(明)나라 사신을 위해 거행한 근정전 연향의 광경을 그린 것이다. 근정전청연이란 명나라 사신이 서울에 온 지 3일째 되는 날 사신일행을 정전(正殿)으로 청하여 왕이 친림한 가운데 치르는 공식적인 잔치 중의 하나이다. 당시 정사(正使)였던 공용경은 다시 보기 힘든 이 아름다운 연향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줄 것을 왕에게 부탁하였고, 이에 중종은 화원을 궐내로 불러들여 연향 절차를 잘 아는 예방승지(禮房承旨)의 감독 아래 청연도를 그리게 하였다. 예법체 어긋나지 않고 위의(威儀)를 잃지 않도록 의식을 묘사해야 했으므로 매우 신중을 요하는 문제였다.
‘영조도(迎詔圖)’ 역시 ‘근정전청연도’와 마찬가지로 사신 접대를 위한 공식적인 예물(禮物)이 아니라 명나라 사신 개인의 취향에 따라 조선에 온 기념으로 요구되곤 하였다. 명나라 사신에게 선사한 ‘영조도’는 1537년과 1539년에 제작된 기록이 있다. 1537년에 온 명나라 사신 공용경은 모화관(慕華館)에서 왕이 조서(詔書)를 맞이하는 그림을 요구하였고, 조정에서는 명나라 사신일행의 귀국일자에 맞추어 급히 그림을 그려 전달하였다. 모화관에서 조사 일행을 맞이하는 백관의 반열과 군사의 위용을 상황과 의절에 맞게 그린 것이었다. 1539년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은 중국에서 이 그림을 관람한 적이 있다고 하며 자신도 영조도를 갖고 싶어했고, 조정에서는 또 뜻밖의 요청에 허둥지둥 그림을 제작하였는데, 그림이 의절과 부합하는지에 매우 신경을 썼다.
중국 사신에 대한 접대는 오례(五禮)중 빈례(賓禮)에 속하는 내용인데, 이와 관련된 기록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1572년(선조 5) 신종(神宗)의 등극을 알리기 위해 파견된 조사 일행이 의주에 있는 의순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린 <의순관영조도(義順館迎詔圖)>가 남아 있다. 이 그림은 압록강까지 나가 강을 건넌 명나라 사신을 의주까지 맞아들이는 역할을 담당했던 원접사(遠接使)들이 만든 계축으로서 압록강 부근의 정황이 묘사되어 있다.
영조도는 조선에 온 사신마다 모두 요구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모화관영조도’는 특별한 작례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이상으로 의식이 실제로 행해졌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순수하게 국가 전례의 의주를 알기 쉽게 그림으로 풀어서 설명해 놓은 궁중행사도를 상세히 살펴 보았는데, 왕은 궁중행사도의 기념적인 가치보다는 공리적인 가치를 우선으로 하였으므로 교훈을 전달하거나 국가 운영에 지침이 되는 방편으로 궁중행사도를 제작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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