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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계도(僚契圖)-계축(契軸)·계첩(契帖)·계병(契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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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시에 요계를 결성한 뒤 제명록(題名錄)을 제작하거나 기념화를 만드는 명분과 관습은 자연히 국가의 전례(典禮) 의식이나 왕실의 경사스런 의식을 마친 뒤에도 행해져서 궁중행사도 제작으로 연결되었다. 이이명(1658-1722)이 쓴 「의약청제명병서(議藥廳題名屛序)」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한때의 붕유지승(朋遊之勝)도 영구히 전하는데 하물며 함께 근심하고 함께 기뻐한 바가 국운과도 관련되니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는 생각에서 였다.
국가의 공식행사에 대해서 결계하는 경우는 두 가지 기준으로 나뉜다. 그 하나는 행사를 주관했던 임시관청인 도감의 이름 아래 책임자인 당상과 낭관들이 계축·계축·계병을 제작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행사에 참여한 관원들 중에서 서로 공통된 관직을 가졌거나 같은 임무를 수행한 일부 관원들끼리 의견을 모아 제작하는 경우이다. 전자의 좌목은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한 도감의 당상과 낭관들, 후자의 좌목에는 특정 관청 소속의 관원이나 몇몇 뜻을 모은 관원들의 이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에서 국가 전례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궁중행사도는 주로 후자의 경로를 통해 제작되었다.
15세기 이래 개인 문집에는 가례도감(嘉禮都監), 책례도감(冊禮都監), 국장도감(國葬都監), 천릉도감(遷陵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조묘도감(造墓都監), 부묘도감, 평난도감(平難都監), 녹훈도감(錄勳都監), 영접도감(迎接都監), 영정모사도감(影幀模寫都監), 실록청(實錄廳) 등 각종 도감의 계회도에 대한 서문이나 찬시가 매우 많이 남아 있다. 행사의 준비와 집행을 위한 도감은 임시 기구이지만 일종의 관아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그 소속 관원들은 같은 업무를 수행한 동료로서 결계할 수 있는 마땅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도감에서 계축·계첩·계병을 만드는 풍조는 일반 관아의 계회도만큼이나 크게 유행하였는데, 조선 초기부터 시작되어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행은 지나친 유행을 초래하여 17세기 초 무렵에는 심각한 문제로 떠오를 정도가 되었다. 드디어 사간원에서 왕에게 이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게 되었다.
계축과 병장(屛障)의 폐해가 날이 갈수록 심합니다. 도감이라고 호칭하는 여러 곳에서는 으레 계축을 작성하는데, 관청의 물자를 사용하여 허비가 적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말이 아닙니다. 각 아문에 있어서도 이러한 폐단이 많습니다. 이후로는 일체 하지 말도록 승전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소서.
각 도감에서는 도제조, 제조, 도청, 낭청 등 열 명 내외의 책임자들에게 계축을 분배해야 했으므로 한정된 도감의 경비에서 비용을 조달하는 데에 적지 않은 무리가 따랐을 것이다. 계축의 조성이 관청의 물자를 낭비하는 고질적인 폐습이라 하여 제재를 받았지만 그 오래된 전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615년(광해군 7)에도 병조에서 올린 비슷한 기사가 실록에서 다시 발견된다.
도감이 설치되면 으레 허비가 많아서 하인들의 식물(植物)이나 관원의 계축 등 가외로 나가는 갖가지 낭비가 한둘이 아닙니다. 한 치 한 올도 모두 백성의 고혈인데 어찌 흙모래 취급을 해서 함부로 쓰게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번 봉릉도감(封陵都監) 때에는 이런 폐단을 철저히 없애서 그런 큰 역사(役事)에 쓰고 남은 가포 10여 동과 일꾼 수백 명을 병조에 이송했었습니다. ..... (중략) ...... 이번 선수도감(繕修都監)으로 하여금 채택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이러한 신료들의 제언(提言)이 있었음에도 “국가에 일이 있으면 도감을 설치하여 일을 감동(監董)한 신들이 제명하고 병장(屛障)을 만드는 일” 은 경비의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되었던 것 같다.
15·16세기에 제작된 도감의 계축은 현존하는 관청 요계의 계회도처럼 경치 좋은 자연이나 관아에서 벌어진 연회의 모임을 묘사한 계회도가 대부분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1509(중종 4) 연산군 일기를 편찬한 일기청(日記廳) 관원들이 만든 <[연산군]일기세초지도>나 1575년(선조 8)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산릉조성 후에 제작된 <산릉도감제명록> 등이 산수인물도에 제목과 좌목을 갖춘 전형적인 계축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도감에서도 계병은 17세기 이후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파악되며, 계축의 주된 주제였던 연회도와는 다른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1690년(숙종 14) 경종이 왕세자로 책봉될 때 설치된 책례도감에서 제작한 8첩의 <왕세자책례도감계병>은 6첩에 걸쳐 산수인물도가 그려져 있다. 또 하나의 현존하는 작례는 시대가 훨씬 내려오는 1739(영조 15)의 작품이다. 1506년 중종반정 때 폐위되었던 단경왕후(端敬王后)를 복위(復位) 부묘함과 동시에 능을 새로 조성했던 봉릉도감의 계병으로 8첩에 걸쳐 무이구곡도가 그려진 <온릉봉릉도감계병>이다. “대개 도감이 있으면 반드시 계병소(契屛所)가 있어 함께 일한 것을 기록하여 잊지 않게 하는 것이 요사이 풍속이다.” 라는 이 계병의 서문이 말해 주듯이 18세기가 되면 도감의 기념화는 병풍으로 정착되어 갔으며, 도감에 계병소를 설치하여 계병 제작을 행사운영의 한 과정으로서 일괄 처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도감의 계병은 모두 서문과 도제조 이하 도감의 당랑으로 구성된 좌목을 갖추고 있으며, 그림의 주제가 산수·인물·고사(故事) 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계축이 연음(宴飮)을 전형적인 주제로 삼아 독특한 양식을 창출하는 데 한몫을 하였지만, 계병의 경우에는 화면의 규모나 병풍의 용처 등을 고려할 때 계축과 동일한 주제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의식 자체를 사실적인 행사도로 그렸던 것은 아니다. 탄강(誕降)·국장·산릉·부묘·실록 완성·영정모사 등의 행사는 의식 자체를 사실적인 행사도로 재현하기에 부적합하며, 그러한 내용의 그림을 기념화로서 대대로 보관하는 것이 요계도 제작의 취지와 부합하지 않았던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향은 1800년에 제작된 선전관(宣傳官)들의 <왕세자책례계병>이나 1812년경에 제작된 산실청(産室廳) 관원들의 <왕세자탄강계병> 이 요지연(瑤池宴)이나 반도회(蟠桃會)를 주제로 그려졌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19세기까지도 계속되었다.

《문효세자책례계병》, 1784년, 서울대학교박물관
이상으로 살펴본 바로 의하면 도감의 당랑들이 주축이 되어 공식적으로 제작되는 계축·계첩·계병에는 궁중행사가 거의 그려지지 않았던 것 같다. 궁중행사라는 주제의 수용은 도감의 당랑들 외에, 행사에 참여한 관원들 중에서 특정한 공통점을 가진 관원들끼리 제작한 계축·계첩·계병에서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표 2> 궁중행사도 계축·계첩 일람표

<표 3> 국가 행사 관련 계병 일람표
관리들은 국가행사 뒤에 동관(同官)과 동사(同事)의 의미를 찾아 결계하고, 화원에게 의뢰하여 기념화를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이들의 모임은 국가 행사에 같이 참여하였거나 왕실의 경사를 함께 한 동료의 의리로 결속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관료사회에 만연해 있던 일종의 요계의 성격을 띠었고, 기념화도 보통의 계회도와 마찬가지로 계축·계첩·계병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림의 제작 취지와 실제 제작 담당자가 관청 안에 결성된 일반적인 요계의 계회도와 같았으므로, 시대의 흐름에 따른 장황 형식의 변화와 그에 알맞은 주제의 선택 등 그림의 제작과 관련된 기본적인 사실들은 많은 부분을 서로 공유하였다.
국가의 중대사에 함께 근심하고 함께 기뻐하며 고생한 동사의 의미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은 국가의 역사(役事)에 함께 일한 노고의 막중함과 그 자취를 잊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의 경위와 함께 그림을 그리지 않을 수 없었던 당위성은 구성원 사이의 결속력을 강조한 모임의 취지와 함께 서문에 뚜렷하게 표명되어 있다. 심지어는 한 관아에서 같이 일하며 성거(盛擧)를 본 것을 인력으로는 억지로 할 수 없는 하늘이 준 운명으로까지 간주하였던 것이다.

<水門上親臨觀役圖>, 196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이러한 서문은 제명의 뜻을 좀더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해 쓰여졌다. 제명록 즉 좌목은 곧 그림의 제작에 동의하고 나중에는 소장자가 될 사람들의 명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궁중행사도의 제작을 주도한 관료 모임의 현상을 밝히고 성격을 구명하는 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런 만큼 서문은 생략되어도 좌목이 빠지는 경우는 없을 정도로 궁중행사도에서 중요시되는 부분이 바로 좌목이다.
현존하는 궁중행사도는 모두 좌목을 갖추고 있는데, 의식에 참여한 주요 관원 전체가 좌목에 올라 있는 경우도 있지만 같은 품계를 가졌거나, 같은 관아에서 일했거나, 혹은 행사에서 특정 임무를 함께 수행한 공통분모를 가진 관원들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표 2, 3> 참조)
참여 관원들은 소속 관청·품계·역할에 따라 여러 부류로 나뉘어 따로 그림의 제작을 발의하였고, 별개의 계축이나 계첩, 혹은 계병을 만든 것이다. 따라서 한 행사에 대해 여러 요계가 결성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기념화를 제작하여 소장하게 된 것이다. (<표 4> 참조)

<표 4> 관청별로 형식을 달리한 궁중행사도 작례일시
그 몇가지 예를 살펴보면 1706년(숙종 32)의 진연례를 거행한 뒤 기로신들은 <진연도첩>에 그 광경을 담았고, 의정부에서는 계병을 만들었으며, 다른 관청에서도 각자 계축을 제작하였다.

《준천계첩》 제2장면, 1760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1710년 숙종의 천연두가 회복된 것을 축하하는 진연을 마친 뒤에도 여러 종류의 행사도가 만들어졌다. 숙종에 대한 왕세자의 지극한 정성과 효성을 지켜 본 세자시강원 관원, 숙종의 진료와 탕약의 조제를 맡았던 의약청 관원, 가까이에서 그 사실을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한 예문관 검열 등은 서로 다른 계병을 만들었던 것이다. 또 숙종의 환후 회복을 축하하는 진연에 초대되어 시연(侍宴)했던 관원들은 계축을 조성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현재 남아 있는 <숭정전진연도>이다.
1879년(고종 16)에는 왕세자의 천연두 증세가 회복된 뒤에 오위도총부·오위의 위장소에서는 각각 진하(陳賀)를 내용으로 한 계병을 조성하였다. 이처럼 소속 관청별로 그림을 제작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준천계첩>처럼 행사 과정에서 좌목의 구성원에게 주어진 역할이 각각 달랐던 경우도 있다.

《기사경회첩》제1장면, 1744~1745년, 국립중앙박물관
1744년(영조 20) 10월 7일 영조의 입기로소를 축하하는 숭정전 진연을 거행한 뒤, 기로소에서는 계첩을 만들고 종친부(宗親府)에서는 계병과 계축을 조성하였다. 다행히도 기로소에서 제작한 계첩은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이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고, 종친부에서 만든 계병과 계축에 관해서는 그 제작 경위와 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된 <(갑자년) 계병등록>이 남아 있다. 이 등록을 통해 관청 주도하에 관원들 중심으로 제작되는 궁중행사도의 제작 과정에 대한 좀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사실들을 접할 수 있다. (<표 5> 참조)

<표 5> 18세기 중엽 계병 제작의 내역
1744년(영조 20) 종친부계병의 경우
등록의 내용 일부를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전교를 내리길 “서경(書經)에 ‘구족(九族)을 친하게 하라’고 했다. 내가 경험한 바로서 말한다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오로지 역대 선조들이 음으로 도와주신 데 연유한 것이다. 그 은혜를 추모하여 일가를 돈독히 하고 선조를 위하여, 진연이 끝난 후 오늘의 어찬(御饌)과 남은 음식을 특별히 종친부에 내릴 것이니 종친부에 모여 즐거움을 끝까지 다하도록 하라. 이미 연회에 필요한 물자를 내렸으므로 음악을 하사하되 단지 풍악(風樂)만을 사용하라” 고 하였다.
그날 종친부 연회가 파한 후 약간의 종친부 저축으로 병풍 네 좌와 족자 36건을 만들었다. 진연에 진참하였던 종친들과 낭청에게 족자 한 건씩을 나누어 주고 병풍은 당상 세 명에게 올리며 종친부에도 한 좌를 보관하는 일.
계병의 제 1첩은 전교(傳敎), 제 2첩은 진연시 좌목과 종친부 사연(賜宴)시 좌목, 제 3첩과 4첩은 ‘[숭정전] 진연도’, 제 5첩은 ‘종친부사연도’, 제 6첩은 ‘진전도’, 제 7첩은 전문(箋文), 제 8첩은 발문이다.
족자의 윗부분은 ‘종친부사연도’이며 아래 부분은 사연시 좌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11월 일에 병풍과 족자의 물력(物力)이 마련되었다.
이 계병은 진연을 마치고 이어서 영조가 종친부에 내린 사연을 기념한 것이었다. 종친사연(宗親賜宴_)은 종친에 대한 예우로써 조선 초부터 가장 빈번한 사연 가운데 하나였으며, 종친부에서는 이를 기념하여 기념화를 만드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종친부사연도>, 1744년, 견본채색, 서울대학교박물관
이 등록에 의하면 병풍과 족자, 즉 계병과 계축의 두 가지 형식이 제작되어 관계(官階_)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분배하였는데, 병풍은 종친부 보관용과 당상에게만 올리고 그 아래의 종친에게는 족자를 나누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 제작된 족자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되는 그림이 바로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종친부사연도>이다. 그림의 형식과 규모를 달리하여 분배하는 제도는 품계에 따른 구별의 의미도 있었겠지만, 병풍의 조성에 필요한 물력과 공전(功錢)이 족자에 비해 세 배 이상 많이 들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사정이 좌목에 있는 인물 모두에게 동일한 도병을 나누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품계에 따른 그림의 형식과 규모의 차등은 18세기 이후 계병이 주된 형식으로 자리잡은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갑자년) 계병등록>을 통해,
① 병풍과 족자의 좌목은 그림의 분하대상에 맞추어 달리하였다는 점,
② 개인적으로 계병의 조성 비용을 갹출하지 않고 그동안 저축하였던 종친부의 공금으로 관아 차원에서 제작하였다는 점,
③ 종친부 보관용으로 병풍 1좌가 비치되지만, 어람용이나 내입을 목적으로 제작되었다는 명시가 없는 점,
④ 병풍은 8첩으로서 진연도·사연도·진찬도의 세 장면이 두 첩 혹은 한 첩에 그려진 점,
⑤ 족자는 사연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분하되므로 그에 합당한 사연도가 그려진 점등을 확인할 수 있다.
궁중행사도 계병의 제작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인 등록에도 궁중 내입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 것은 국가 행사의 뒤를 마치고 그 모습을 담은 궁중행사도가 애당초 관원들 사이의 계축·계첩·계병으로 제작되었음을 증명한다.
만일 관원들의 분배용과 함께 어람용을 제작하였다면 왕과 관련된 이 사실은 서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사로서 우선적으로 기술되는 것이 당연한 원칙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왕이 국가의 전례의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행사도를 내입하라고 지시했거나 관원들이 내장(內藏)을 위해 진헌했다는 기록을 찾기 어려운 것은 왕의 이런 명령 자체가 매우 드문 일이었으며, 신하들이 발의하여 행사도를 그리는 경우처럼 관례적인 절차도 아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어명이나 왕의 특별한 지시가 있었을 경우에는 대부분 그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는데,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모두 18세기 후반 이후의 기록이다. 임금은 물론 신하들의 궁중행사도 제작의 관행을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림이 완상(玩賞)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늘 경계하여야 했고 국정을 원활히 운영하기 위한 기록매체나 감계(鑑戒)의 수단에만 그림의 가치를 두었던 왕은 자신이 참여하여 직접 지켜 본 행사의 모습을 구태여 다시 그림으로 그려 간직해야 할 필요성이 없었는지로 모른다.
대부분의 궁중행사도 서문에는 행사가 끝난 뒤 물러난 관원들이 서로 모여 의논한 끝에 그림의 제작을 결정하였다는 내용을 밝힘으로써 그 제작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의식이 끝난 뒤 행사에 참여했던 관원들은 당시의 감격이 희미해지는 것을 염려하였고 오래도록 그 느낌과 광경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 성사(盛事)를 장황하게 드러내고 한때의 아름다움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오래되면 잊혀지는 것이 두려워 그 모습을 오래 간직하고자 ” 그 모습을 그림에 담아서 ‘대대로 물려줄 보물’로 집안에 영구히 보존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우선 글로 행사를 치르게 된 연유와 과정, 의의를 상세히 기록하지만, 충분치 않다고 여겼기 때문에 시각적인 보완을 위해 그림을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그림은 글로써 설명하기에 곤란하거나 묘사하기 어려운 부분을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한 시각적인 효용성 때문에 글보다 더 영구히 보존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 같다. 즉 글과 함께 그림이 있어야만 오래도록 생생하게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관료들이 궁중행사도를 제작하는 다른 하나의 목적은 임금을 보필하는 충과 가문을 빛내는 효의 덕목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점에 있었다. 1710년(숙종 36) 왕의 환후가 회복된 것을 축하하는 진연을 기념하여 만든 세자시강원의 계병 서문에 그러한 의식과 제작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왕이 쾌유한 경사는 세자 저하의 지극한 정성과 효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략) 아, 세자 저하가 근심에 싸여 있을 때 우리 신하들도 같이 근심하였다. 지금 술잔을 들어 헌수하고 춤추며 그 뜻을 펼치는 때에 이르니 세자 저하가 기뻐하시고 우리 신하들도 똑같이 기쁘다. 한번 근심하고 한번 기뻐함에 세자 저하의 효성이 나타나 있다. 함께 근심하고 함께 기뻐하는 것 역시 우리 신하들이 서로 따르고 힘쓴 것이다. 이것이 계병을 만드는 이유이다. 여러 동료들이 기록하고 싶어한 것은 조종과 국가의 경사를 알리고 세자 저하의 기쁨을 계승하며, 아울러 우리 신하들의 영광을 보이고자 함이다.
자신들의 기쁨과 슬픔, 그리고 명예가 모두 세자에게서 비롯되는 것을 신료로서의 당연한 도리로 여겼다. 또 그림을 통해, “장차 천백년 뒤에라도 역대 성왕(聖王_)의 은덕을 우러러 볼 수 있도록 ” 하려는 것은 무엇보다 국왕에 대한 충성의 표시였다. 임금이 내려준 술과 옷감을 받고 “성은을 마음에 간직한 채 죽을 곳을 찾지 못할 정도로 감격한” 내신(內臣)들이 그 뜻을 그림에 의탁했던 것은 임금에 대한 충성의 마음을 그림이란 매개체를 통해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였으며, 임금에 대한 감은을 그림에 실어 벽에 걸어 두고 늘 바라보면서 충효의 마음을 되새기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먼저 나라에 경사가 생기면 이는 왕이 선정을 베푼 결과라고 생각하여 그 길사(吉事)의 공덕을 우선 왕에게로 돌렸다. 왕조사회에서 국민의 사회적 존재 방식은 국왕에 대해 신민(臣民)으로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국왕을 잘 받들어 모시는 것이 신민으로서 본분을 다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역사적인 사건에 직책이 부여됨을 군신관계에서 파악하였고, 관직을 얻어 성사에 참여한 영광을 모두 왕의 은덕으로 생각하였다.
계축·계첩·계병으로 제작된 궁중행사도의 대부분이 연향도(宴享圖)와 진하도(陳賀圖)를 내용으로 선택한 점도 궁중행사도의 제작 목적에 군신관계를 강조하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편 이와 같은 궁중행사도를 제작하는 표면적인 이유의 이면에는 문벌과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관료들의 엘리트 의식이 강하게 깔려 있었다. 관료로서 국가의 경사일에 직책을 맡을 수 있었던 영광과 그 존귀함에 대한 가치관은 자신들이 관리로 선발된 것에 대한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조선시대 관료들은 궁중행사도를 통해 신료로서 관직을 지내며 특별한 일을 해냈다는 개인적인 업적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조선시대 관료사회에서는 문지(門地)의 높고 낮음이 많은 것을 좌우하였다. 이를 위해 집안에 현조(顯祖)가 있어야 하였고, 업적을 이룩하는데 성공한 조상이 계속 배출되어야 문벌의 전통이 유지되었다. 문벌을 숭상하는 풍조로 인해 자신과 후손을 위해 가계의 배경과 역사를 널리 알리는 것이 필요했고, 그것이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되기를 원하였다.
양반 관료들의 문벌을 숭상하는 사조와 관습은 후대에 올수록 더 커져 갔다. 궁중행사도의 제작이 18세기가 되면 더욱 성행하고 19세기가 되면 관례적인 일이 되는 것은 모두 문벌을 중시하는 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18세기에는 문중의 위상을 홍보하기 위해서 족보·선조의 문집·행장(行狀)의 발간, 비석의 건립 등의 활동이 적극적으로 행해졌고, 조상의 행적이 담긴 그림들을 모은 가전화첩이 등장하여 20세기 전반까지 계속 제작되었던 것 역시 일종의 가문의 역사에 대한 기록물로서 문중의 권위를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19세기말의 한 회갑연 기념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집안 어른의 회갑 잔치의 큰 상 뒤에 그린 병풍 대신 진찬도병을 설치한 행위에서 주인공이 지나온 관직 생활과 경력을 과시함으로써 집안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를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아울러 궁중행사도가 개인의 소장물로 집안에 매우 소중히 간직되고 있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제명이 덧붙여진 궁중행사도는 조선시대 양반관료들의 관직과 문벌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더없이 좋은 수단이었을 것이다. 한때 주요 관료였던 활동상과 공적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니 가문의 역사를 내세우는 데 훌륭한 근거가 되며, 이는 후손들에게 더없는 명예로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의 문벌 의식이 강해짐에 따라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는 노력은 더욱 강해졌고, 선조의 자취를 기록하려는 취지에서 궁중행사도 제작도 같은 맥락에서 발전하였다.
이상으로 조선시대에는 국초부터 관청 동료들 사이에 계가 결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요계도를 제작하여 나누어 가졌으며, 궁중행사도는 국가행사를 마친 뒤 그 광경을 기념하고 싶은 관료들이 관청과 관직중심으로 만든 계축·계첩·계병의 한 경향이었음을 살펴 보았다. 따라서 관청에 조직되어 있던 일반적인 요계도의 장황 형식과 궁중행사도의 장황 형식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그림의 주제와 수용시기도 궤를 같이하며 변하는 것도 알 수 있다.
현재 조사된 기록으로는 궁중행사도의 시작은 관료들 세계에 형성된 하나의 전통이자 관습에서 비롯되었으며, 어명에 의해 국가적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기록상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왕과 관련된 내용의 궁중행사도인 만큼 궁중에 내입하는 것이 당연한 상례(常例)로 행해졌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왕의 지시에 의한 궁중행사도의 제작과 궁중 내입은 18세기 후반의 변모된 양상으로 파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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