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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궤의 제작과 보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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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궤의 제작과 보관
의궤에 기록된 각종 행사를 위해서는 도감(都監)이라는 임시기구가 먼저 설치되었다. 도감은 행사의 명칭에 따라 각각 그 이름이 달랐다. 즉 왕실의 혼례의 경우에는 가례도감, 국왕이나 왕세자의 책봉의식에는 책례도감, 왕실의 장례에는 국장도감, 사신을 맞이한 행사일 경우에는 영접도감, 궁궐의 건축과 같은 일을 행할 때는 영건도감 등과 같은 이름을 붙였으며, 이들 임시기구인 도감에서는 각기 맡은 행사를 주관하였다. 오늘날로 치면 올림픽 조직위원회, 월드컵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도감은 임시로 설치되는 기구이므로 관리들이 겸직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감의 직제는 대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먼저 총책임자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 1인은 정승급에서 임명되었으며, 부책임자급인 제조(提調) 3~4명은 판서급에서 맡았다.
실무 관리자들인 도청(都廳) 2~3명, 낭청(郎廳) 4~8명 및 감독관에 해당하는 감조관(監造官) 6명은 당하관의 벼슬아치들 중에서 뽑았으며, 그 아래에 문서작성, 문서수발, 회계, 창고정리 등의 행정 지원을 맡은 산원(算員), 녹사(錄事), 서리(書吏), 서사(書士), 고지기(庫直), 사령(使令) 등이 수명씩 임명되었다. 도감에서는 행사를 지휘하는 관리자들과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을 고르게 배치하였으며, 행사의 성격에 따라 인원의 증감이 있었다.
행사의 성격에 따라 구성된 각 도감에서는 행사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전 과정을 날짜순으로 정리한 등록(謄錄)을 먼저 만들고 이를 정리하여 의궤를 제작하였다. 의궤는 보통 5부에서 9부를 만들었다.
국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의궤 1부는 규장각에 올리고(고종대 이후에는 황제와 황태자용 의궤를 비롯하여 2부 이상의 어람용 의궤를 제작하였다.), 나머지 의궤는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 부서와 지방의 각 사고(史庫)에 나누어서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의궤의 표지에 ‘정족산상(鼎足山上)’‘오대산상(五臺山上)’ 등으로 쓰여있는 것은 각각 정족산 사고와 오대산 사고에 보내져 보관되어 온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2) 의궤의 보관처
사고는 의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 역대의 중요 자료들이 보관된 곳이었다. 사고는 대개 왕실관계 자료를 보관한 선원보각(璿그림 자경전진작정례의궤 源寶閣)과 실록 등을 보관한 사각(史閣)으로 구성되었으며, 사고를 지키는 수호 사찰을 꼭 설치하였다.
1872년에 그려진 무주부 지도에는 적상산 사고의 모습 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 지도에는 선원보각과 사각을 비롯하여, 수호사찰, 참봉전, 군기청 등 사고를 구성하는 주요한 건 물의 위치와 이름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사고는 2층의 목조건물로 구성되었고, 방화를 위하여 2중으로 된 방화벽을 설치하는 등 세심한 신경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제작된 지도들에는 사고가 꼭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조선시대에 사고가 중시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천재화가 김홍도가 정조의 명을 받아 관동지방의 뛰어난 경치를 그리면서 오대산사고를 포함시킨 것에서 조선시대 인들에게 사고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와 해방기를 거치면서 사고는 우리의 관심속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나마 최근에 와서 조선후기의 4대 사고들이 복원되고 있는 현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진다.
의궤는 편찬이 완료되면 실록과 마찬가지로 춘추관과 지방 네 곳의 사고에 분산 보관되었다. 춘추관과 지방의 사고라 하면 우리는 얼른 조선왕조실록을 떠올리지만, 실제 사고에는 실록만이 아니라 의궤를 비롯하여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璿源譜)나, 국가적으로 중요하게 취급된『고려사』, 『동국통감(東國通鑑)』,『여지승람(輿地勝覽)』,『동문선(東文選)』 등과 같은 역사서, 지리서, 예서들도 함께 사고에 보관되었다.
조선시대의 사고체제는 임진왜란을 경험한 조선후기 이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조선초기에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서울의 춘추관사고와 지방의 충주사고라는 2원 체제로 운영되다가, 다시 세종대에 이르러 경상도 성주사고와 전라도 전주사고를 추가하여 4사고 체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전기의 4사고는 교통의 요지인 서울과 지방관이 거주하는 읍치(邑治)에 위치해 있어서 화재나 도난에 의한 서책의 훼손 가능성이 언제나 제기되었다. 실제 중종대에는 비둘기를 잡으려다 화재가 발생하여 실록을 비롯한 대부분의 책들이 소실되기도 했다. .
1592년의 임진왜란은 교통과 인구가 밀집한 읍치에 소재한 사고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즉 왜적들의 주요 침입루트가 된 춘추관, 충주, 성주의 사고는 모두 병화의 피해를 입고 그 존재가 사라졌다. 다행히 전주사고본의 책들은 사고 참봉(參奉)인 오희길(吳希吉)과 전주 지역 유생인 손홍록(孫弘綠), 안의(安義)와 같은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내장산까지 옮겨지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보존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사고가 지역 중심지에서 험준한 산 위로 올라간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이었다. 여러 곳에 분산하여 보관함으로써 완전한 소실은 면했지만 교통이 편리한 지역은 전쟁이나, 화재, 도난의 우려가 커서 완벽하게 보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사고들이 산으로 간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당대인들이 관리하고 보존하기에는 훨씬 힘이 들지 만 후대에까지 길이 자료를 보존하기 위해 험준한 산 지만을 골라 사고를 설치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광해군대 이후 조선의 사고는 5사고 체제로 운영되었다. 서울의 춘추관사고를 비롯하여 강화도의 마니산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사고가 그것이다. 춘추관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를 지역별 안배를 가한 후에 험준한 산지에 배치한 것이다. 그 후 묘향산사고는 후금(뒤의 청나라)의 침입을 대비하여 적상산성이라는 천연의 요새로 둘러싸인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사고로 이전했으며, 강화의 마니산사고는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손되고 1653년(효종 4) 화재가 일어나면서 1660년(현종 1)에 인근의 정족산사고로 이전하였다. 따라서 조선후기 지방의 4사고는 정족산, 적상산, 태백산, 오대산으로 확정되었고 이 체제는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대로 지속되었다. 현재 태백산, 오대산, 정족산에 보관된 의궤의 대부분은 현재의 서울대 규장각으로 이어졌고, 적상산사고의 의궤들은 정신문화연구원의 장서각으로 이관되었다.
이처럼 사고를 산간지역에 둔 것은 무엇보다 외적의 침입에 대처하려는 뜻이 담겨져 있다. 특히 전란 속에서 사고가 훼손되자 무엇보다 적의 침입에 노출되지 않은 지역을 선택한 것이다. 사고 옆에 수호 사찰을 두어 승병들로 하여금 사고를 지키게 한 것도 이러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또한 일반인들의 접근도 용이하지 않는 지역을 선택 함으로써 화재나 도난과 같은 미연의 사고를 방지하는 효과도 거둘 수 있었다. 우리가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어람용의궤 이외에 대부분의 의궤 실물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조선후기에 사고를 가장 안전한 곳에 배치한 선인들의 지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3) 어람용의궤의 보관처 외규장각
의궤 중에서도 특히 주목되는 것은 국왕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제작된 ‘어람용 의궤’이다.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열람한 후에 규장각에 보관하였다가 1781년 강화도에 외규장각을 설치한 후에는 이곳에 옮겨 보관하였다. 어람용 의궤는 종이로 고급 초주지(草를注紙)를 사용하고 사자관(寫字官)이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했다. 어람용은 장정 또한 호화로왔다. 놋쇠 물림(경첩)으로 묶었으며, 원환(圓環), 박을정(乙丁) 등을 사용하여 장정하였다. 표지는 비단으로 화려하게 만들어서 왕실의 품격을 한껏 높였다. 어람용이 아닌 분상용 의궤(사고 등에 나누어 보관되었기 때문에 분상용 의궤라고 한다)에는 초주지 보다 질이 떨어지는 저주지(楮注紙)가 사용되었으며, 검은 선을 두르고 삼베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한 만큼 일반 의궤의 장정이나 글씨도 뛰어나지만 어람용 의궤의 그것을 보면 문외한이라도 그 화려함과 품격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아래의 도표는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를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를 대체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정조대 이후 어람용 의궤는 국왕이 친히 열람한 후에 규장각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규장각은 궁궐의 한 복판에 위치하여 규장각에 보관된 자료들이 외침이나 정변에 안전지대가 될 수가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이에 영명한 군주 정조는 고려시대 이래로 국가의 보장지처(保障之處)로 주목받던 강화도에 규장각의 분소(分所)를 설치할 것을 명하였다. 1782년(정조 6)에 정조의 명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외규장각이 완공되고 이곳에 어람용 의궤를 비롯하여 어제(御製)·어필(御筆)·어화(御畵) 등 왕실에 관련된 물품들을 집중적으로 보관하였다.
그러나 국방상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외규장각은 1866년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입을 받으면서 철저히 파괴되었다. 강화도를 침략한 프랑스군은 퇴각하면서 은괴 상자와 함께 외규장각 소장 자료 중 특히 의궤류들을 집중적으로 약탈하였다. 벽안의 눈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장정과 화려한 채색그림이 지닌 어람용 의궤의 가치가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이리라. 프랑스에 의궤를 약탈당한 것은 우리 근대사의 또다른 비운이었다. 의궤 중에서도 국왕이 친히 열람했던 어람용 의궤들 상당수는 현재 이국땅인 프랑스의 파리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파리에 보관된 어람용의궤의 보관상태는 양호한 편이나 297책 중 10여책을 제외하고는 원래의 비단 표지가 훼손되어 재 장정된 점이 무척이나 아쉽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각 사고나 관련 부서에 보관되었던 의궤들이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의궤에 나타난 각종 행사의 구체적인 내용들은 여전히 접할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서울대학교 규장각은 ‘의궤의 보고(寶庫)’라 할 만큼 조선후기에 제작된 각종 의궤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의궤를 제작하기 전 단계의 기록인 등록(謄錄) 자료를 포함하면 현재 약 600여종, 3,00여책의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외규장각이 세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다가 1866년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당했던 『휘경원 원소도감의궤』라는 책을 한국 정부에 반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이후였다.
1993년 프랑스에서 의궤 2책이 반환되어 언론에 보도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 의궤의 선명한 글씨와 아름답게 장식된 장정을 보고 프랑스인들의 자료보관에 감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처럼 의궤가 원형의 상태로 남아 있었던 것은 조선시대의 의궤 자체가 뛰어난 종이질로 만들어졌고, 의궤에 첨부된 그림의 물감은 천연의 광물이나 식물에서 채취하여 그 색채의 생명력이 오래 갔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프랑스인의 보존에 찬사를 보낼 것이 아니라 조선시대 우리 선인들의 우수성에 감탄을 해야만 옳았던 것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외규장각에 소장된 각종 도서 중에서 유독 위궤류만을 집중적으로 약탈한 것도, 의궤에 그려진 채색그림이 지닌 가치와 예술성이 벽안의 눈에 번쩍 띄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외규장각은 정조대의 영광을 뒤로 하고,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철저히 파괴되었다. 강화도에 주둔했던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강렬한 저항으로 퇴각하면서 외규장각에 보관되었던 우리 문화의 보고(寶庫)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은괴 19상자와 함께 그들이방인의 눈을 자극한 것은 채색 비단 장정에 선명한 그림으로 장식된 어람용 의궤들이었다. 189종 340여책의 의궤는 이들의 퇴각과 함께 약탈당했으며, 당시 화염에 휩싸였던 외규장각은 그 흔적만을 남긴 채 백여년을 뛰어넘어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1866년 강화도를 침공했던 프랑스의 해군장교 주베르가 ‘이 곳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 밖에 없고 우리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어디든지 책이 있다는 사실이다’고 고백했듯이, 조선인들은 누구나 책을 가까이 했으며 이러한 조선문화의 최선봉에 규장각과 외규장각이 있었다.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정수를 담아왔던 외규장각! 이러한 문화유산의 현장을 복원하여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저력을 찾아보는 몫은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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