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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축제의 역사적 의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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⑴ 조선시대 왕실의 축제 모습을 기록한 자료
조선시대 왕실의 주요 축제 의식으로는 국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 왕의 즉위식, 국왕이나 왕비의 기념일을 맞이하여 벌이는 잔치 의식, 왕의 행차 의식, 왕의 활쏘기 의식 등 다양한 의식들이 있다. 이러한 의식들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와 같은 국가에서 정리한 의례서나, 주요 의식이 끝난 후에 그것을 기록으로 정리하여 후대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된 의궤(儀軌)에 잘 남아 있다.
의궤는 왕실의 주요 행사를 기록으로 정리한 것으로 국왕이나 왕비의 장례식과 같은 흉례(凶禮)에 해당하는 내용도 있지만 왕실의 결혼식과 같은 축제 의식을 기록한 의궤들도 다수가 남아 있다. 특히 왕실의 축제에는 왕과 왕비를 중심으로 하여 왕실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의 다양한 면모와 함께 의식에 동원된 각종 물품이나 가마, 의장기(儀仗旗), 복식 등이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 정리되어 있어서 전통 시대 왕실 행사의 면면을 살펴보는데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왕실의 결혼 의식을 정리한 『가례도감의궤』에 그려진 반차도에는 행사 참여자의 모습이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담겨져 있으며, 왕실의 잔치 의식을 정리한 『진찬의궤』. 『진연의궤』, 『진작의궤』 등의 앞 부분에는 진찬도(進饌圖) 등 잔치 행사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다. 궁중잔치의 모습을 정리한 의궤에는 잔치에 올린 음식물을 비롯하여, 잔치에 필수적으로 따랐던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각 무용을 공연한 기생들의 복장과 명단을 비롯하여 왕실에 바쳐진 꽃 등 조선시대 궁중 의식의 면모를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들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잔치 때의 참여자들의 위치를 미리 그려놓은 반차도와 궁중무용의 구체적인 모습, 연주된 악기와 복식, 그릇 및 상위에 올려진 꽃 등은 잔치 관련 의궤가 아니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자료들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방안을 마련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생활의 현장에서 직접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은 우리 문화의 원형 복원이라는 측면에서도 의미가 클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왕실축제의 모습은 『가례도감의궤』로 대표되는 의궤의 기록과 당시의 핵심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한 반차도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반차도는 각 행사가 있을 때 임무에 따라 그 일을 맡은 관리나 악대, 군사들이 그 자리에 위치해 있은 모습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 반차도는 행사가 있을 때 미리 그림을 그려 도상(圖上) 연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성격도 띠었다. 따라서 반차도에는 왕과 왕비의 모습을 비롯하여 관리, 상궁, 나인, 내시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모습과 각종의 의장기와 악기의 실제 모습도 접할 수가 있으며 당시 왕실 축제의 세세한 부분까지 접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⑵ 왕실 축제 자료의 의미와 활용
*『가례도감의궤』의 경우
예를들어 조선시대 최장수 집권 왕 66세의 영조와 19세기 수렴청정의 정점에 있었던 15세의 신부 정순왕후의 결혼식을 정리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무엇보다 왕실 결혼의 이모저모를 이처럼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겨둔 선인들의 노력과 지혜에 깊은 찬탄을 보내고 싶다.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기록으로 남겨두고 이를 후대의 국정에 적극 활용함으로써 국력의 낭비를 막으면서 전대의 의례를 준행하고,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특히 이 의궤에는 18세기 중엽 결혼식의 모습이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그 파노라마들은 마지막 부분에 함께 합쳐져 반차도로 구현되었다. 반차도는 사진기나 비디오가 없던 당시의 모습들을 입체적이고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영상자료이다. 국왕과 왕비의 가마를 비롯하여 행사에 참여한 관리와 호위병, 내시, 궁녀들의 모습과 각각의 빛깔을 띤 말들, 의장기와 부채, 악대의 모습에서 장엄하고 화려한 국왕의 행렬을 마치 그 시대 속으로 들어가 접하는 듯하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는 18세기 중반에 벌어졌던 국왕의 결혼식을 준비했던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자취가 물씬 배겨나는 보고서이자 기록물인 것이다.
의궤에 나타난 기록들은 우리에게 많은 지혜를 준다. 물품의 재료, 빛깔, 크기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물품 하나하나에 정성을 다한 모습이며, 이러한 물품을 만든 사람들의 실명을 모두 기록하여 그들에게 책임감과 자부심을 부여해 준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해준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것에 대해선 매우 민감하나 정신적인 이념에 대해서는 소홀히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시대 보다 훨씬 과학기술이 뛰어난 현대사회에서 성수대교의 붕괴나 삼풍백화점 참사와 같은 대형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은 건축물에 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품 하나하나 마다 그 제작자의 실명을 밝힌 것은 이들에게 건축물이라는 물질적인 요소 이외에 물건을 만드는 장인의 혼과 정신을 불러일으켜 주려는 뜻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만든 작품에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끼면서 목숨까지 바칠 각오로 정성들여 만드는 조선시대 장인들의 정신이 새삼 그리워진다.
또한 이들 의궤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전통 물품들이 한자어로 표기되어 친숙미를 더해준다. 대야(大也), 동이(東海), 치마, 바지(把持), 요강(要江) 등이 대표적인 생활용어들로서 의궤를 통하여 당시 생활사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기록의 철저함이다. 국가의 행사를 자세히 기록하여 후세에 남긴다는 정신은 물품 하나하나의 크기·빛깔·재료에 관심을 보였으며, 반차도를 그린 화원의 이름과, 행사에 필요한 물품과 장비를 만드는데 참여한 각 匠人의 개별 성명까지를 수록하였다. 이 책은 또한 『실록』 등 기존의 연대기 자료가 갖는 한계성을 많이 보완해 주고 있다. 가례의 과정을 통하여 당시 국가 재정 규모의 일단과 왕의 행차 방향 및 서울의 방어를 담당한 삼군문에 소속된 군사들의 임무와 병력배치 계획 등을 살펴볼 수 있으며, 물품명에 나타난 치마(赤了)·바지(把持)·저고리(赤古里)·방구리(方文里)·대야(大也)·요강(要江)·걸레(擧乃), 곡괭이(串光屎) 등의 고유어가 한자로 표기되어 있어서 우리의 전통용어 표기법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물품의 모습을 그려넗은 각종 도식(圖式)과 가례 행렬의 모습을 순서대로 그린 반차도의 그림을 통하여 입체적으로 당시의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각자료들은 문헌사료가 가지는 단조로움을 충분히 보완해 줄 수 있다. 즉 우리는 의궤에 나타난 시각자료를 통하여 당시의 사회상과 생활상을 쉽게 이해 할 수 있으며, 사진이 없던 과거속으로 보다 생동감 있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경우
1795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아 어머니를 모시고 부친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한 과정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경우에도 왕실 축제의 구체적인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먼저 본 행사는 1795년 윤2월 9일에 시작되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었으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일행은 노량진을 통해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 시흥행궁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휴식 시간에 간식을 먹거나 정식 식사를 할 때에는 음식의 그릇 수,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높이, 밥상을 장식한 꽃의 숫자까지 표시되었다.
둘째 날인 윤2월 10일에는 시흥을 출발하여 청천평(맑은내들)에서 휴식을 하였고,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정조는 길을 재촉하였고, 진목정에 이르러 잠시 휴식한 다음 저녁에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하였다.
다음 날인 윤2월 11일, 정조는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하였다. 오후에는 봉수당에서 회갑 잔치를 예행 연습하였다. 정조는 특히 나라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잔치에는 숙련된 기생을 쓰지 않고 바느질하는 종이나 의녀(醫女)들을 동원하였는데, 이들의 춤 솜씨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윤2월 12일에는 아침에 현륭원에 참배를 하였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 홍씨의 슬픔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정조는 조급하고 당황해 하였다. 오후에 정조는 화성의 서장대에 올라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직접 주관하였다. 화성에 주둔시킨 5천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 날의 훈련은 서울에 있는 반대세력에게 엄청난 시위 효과가 있었다.
윤12월 13일은 이번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거행되었다. 연회 장소의 좌석 배치와 가구들,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손님 13명과 남자손님 69명의 명단이 소개되었다. 또한 잔치에 쓰여진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된 상의 숫자와 음식, 소요 경비가 열거되었다.
윤2월 14일에는 화성의 곤궁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서울에서 정조와 같이 온 관료 15명과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가하였는데 정조와 노인들의 밥상에 오른 음식이 동일하였다. 양로연을 끝으로 공식 행사는 끝났다. 이후 정조는 휴식으로 들어갔는데, 한낮에는 화성의 축성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하였다. 활쏘기의 성적은 정조가 제일 좋았다.
윤2월 15일은 서울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정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시흥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잤고, 윤2월 16일에는 노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시흥을 출발하면서 정조는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듣고자 하였다. 정조가 백성들을 만나 고충을 이야기 할 것을 권유한 끝에 금년에 호역(戶役)에 두 번이나 징발된 폐단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정조는 이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정조의 화성행차는 단순한 왕실 축제에 그치지 않고 이러한 행사를 통하여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고, 백성들의 민원을 청취하고 해결하는 방안이 되었다. 또한 과거 시험과 양로현 등의 행사를 통하여 지역의 인재들을 발탁하고 국왕 스스로가 노인을 공경하는 모습을 모범적으로 보여 주었다. 이 행사의 모습을 그림으로 기록한 반차도에는 왕실 행차의 규모가 잘 나타나 있으며, 행차의 구체적인 모습을 8폭으로 정리한 김홍도의 「수원능행도」를 통해서는 왕과 백성이 함께 하는 왕실 축제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진찬의궤』의 경우
궁중 잔치의식을 정리한 의궤 중 대표적인 것으로 『순조기축진찬의궤』가 있다. 『순조기축진찬의궤』는 1829년 순조가 40세가 되는 동시에 재위 3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잔치를 베푼 행사를 정리한 의궤이다. 본 행사는 1828년 11월에 세자가 예조판서 등과 더불어 국왕의 즉위 30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베풀 것을 논의하고 숙종대와 영조대의 전례를 찾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국왕은 순조였지만 1827년부터 세자인 익종이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행사의 실질적인 주관자는 세자가 된다.
1829년에 행해진 진찬 의식은 크게 대전외진찬(大殿外進饌)·대전내진찬(大殿內進饌)·대전야진찬(大殿夜進饌)·왕세자회작(王世子會酌)으로 구성되었다. 외진찬은 외연, 내진찬은 내연에 해당한다. 외연은 군신이 주축이 되는 연향으로 대비·왕비 등 여성이 참여하는 일이 없지만, 내연은 대비·왕비·세자빈·공주 등의 여성이 참여하는 잔치로서 왕을 비롯한 종친·의빈·척신 등 왕실의 친인척인 남성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전외진찬은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에서, 대전내진찬·대전야진찬·왕세자회작은 왕비의 거처인 자경전(慈慶殿)에서 거행되었다.
의궤의 내용을 항목별로 보면 권두의 「택일」은 행사의 주요 일정을 정리한 것이며, 「좌목」은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설치된 기구인 진찬소와 의궤청의 구성원들의 실명을 기록한 것이다. 「도식」은 행사장의 인원과 그 위치를 표 형식으로 제시한 반차도와 행사장과 행사 장면을 담은 그림, 의식에 소요된 악기, 복식, 물품 등을 구체적으로 밝힌 그림으로 구성되었다. 반차도는 실제 행사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미리 위치와 순서를 익히도록 한 것으로 도상연습에 해당한다. 각종의 그림에는 어좌를 비롯하여 악대, 여기(女妓) 등 공연자들과 의장품을 비롯하여, 참석한 사람들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이들 『진찬의궤』에는 왕실 축제와 관련된 도식(圖式)들이 잘 나타나 있어서 축제시의 인원 배치 상황이라든가 물품이나 악대, 꽃 등의 위치까지 상세히 파악할 수 있다.
⑶ 왕실 축제의 역사적 의미
왕실 축제의식을 대표적으로 정리한 자료로는 『국조오례의』와 함께 궁중기록화, 의궤 등이 있다. 이 중 의궤는 최근까지 주목받지 못했다가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 1책을 국내로 가져오면서 사회적 관심을 끌었다. 이후 의궤 연구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고조되었고 무엇보다 베일에 쌓여 있었던 왕실 행사의 다양한 면모들이 기록과 함께 기림으로 수록된 자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게 인식되었다. 무엇보다 의궤에 정리된 치밀한 왕실 의식과 입체적인 시각 자료는 당대 모습을 현장 속에서 확인할 수 있게 해 준다.
의궤에는 이처럼 우리 전통문화의 정수가 담겨져 있으며, 그 속에는 치열하게 한 시대를 살아간 조상들의 숨결이 배어있다. 이 행사의 주인공이었던 영조와 정순왕후를 비롯하여 행사를 주관하고 준비했던 실무자들, 행사 물품을 정성껏 준비했던 화원과 장인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이 축제의 행사에 참여했을 많은 백성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외에 의궤의 기록에는 결혼과 같은 왕실 축제 행사에 인원과 물품을 동원하는 과정이라든가 행사에 소요되는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려는 모습, 사관이나 화원들로 하여금 행사를 철저하게 기록하려는 모습 등 선조들의 문화와 사상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1795년(정조 20) 정조의 화성행차를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와 「수원능행도」와 같은 기록화에는 왕실 축제에 인근의 백성이 참여하여 한껏 축제분위기를 돋구어 나간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당시 백성들이 축제의 현장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왕실의 결혼이나 국왕의 행차, 왕실 잔치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왕실문화는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당시에 축제의 분위기를 고양해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철저하게 기록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당대의 문화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왕실축제에 나타난 선조들의 전통문화의 장점과 우수성을 살려 현대에 재음미해 나가는 작업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고취시켜 나가는 주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세계화의 구호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요즈음에도 전통과 기록문화를 중시했던 선조들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 지혜를 우리는 왕실의 축제 의식을 표현한 여러 자료들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이러한 뛰어난 전통 유산을 보다 적극적이고 알기 쉬운 방법으로 다양하게 소개하고 홍보하는 과제가 남겨져 있다. 특히 의궤 등에 기록된 시각 자료는 식물이나 광물에서 채취한 천연 물감으로 그려져 있어서 우리의 전통 색채의 멋을 찾는데도 매우 유용하다. 이에 대한 색채 개발은 왕실 축제의 원형을 보존하고 왕실 축제의 멋을 보다 고양시켜줄 것으로 기대된다.
의궤와 같이 최근까지 묻혀져있던 전통문화의 진수들을 찾아 현대적으로 재개발하고 이를 후손들에게까지 전달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다양한 측면들과 그 우수성을 확인시켜 나가는 작업은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21세기 문화대국을 지향하는 우리의 과제와도 부합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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