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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축제의 모습이 잘 표현된 의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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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왕실축제의 모습이 잘 표현된 의궤 : 가례도감의궤
1)가례도감의궤의 구성

조선시대의 의궤 중 가장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은 왕실 결혼식의 모습을 담은 『가례도감의궤』이다. 조선시대에도 결혼은 인생에서 최고의 축제이며 경사였음은 틀림이 없었다. 특히 왕실의 결혼은 국가의 행사 중에서도 가장 큰 경사의 하나였으며, 왕실의 결혼을 가리켜 ‘가례(嘉禮)’라고 칭하였다. 현존하는 『가례도감의궤』는 소현세자의 가례에서 시작하여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가례까지 기록하고 있어서, 『가례도감의궤』를 통해서 시기적으로 조선시대 왕실의 결혼식 장면을 포착할 수 있다. 특히 말미에 그려진 그림(반차도)은 축제의 기분을 한껏 표현해주는 생동감 깊은 내용들로 채워져 있어서 당시의 결혼식 행사에 직접 참여한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반차도는 오늘날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듯한 효과를 안겨다 주는 것이다.
본 장에서는 가례도감의궤 중에서 1759년(영조 35) 66세의 국왕 영조가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하는 결혼식의 전 과정을 정리한 의궤인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를 중심으로 당시 결혼식의 모습 나아가 왕실축제 행사의 단면을 조명해 보았다. 모차르트의 오페라곡으로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 또한 이시기와 비슷한 18세기 후반에 작곡되었다. 오페라로 워낙 알려져 세계 여러 나라에서 18세기 후반 유럽사회의 결혼식의 모습을 접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피가로의 결혼’ 보다도 훨씬 짜임새 있게 기록된『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가 있다. 세계화시대에 우리 전통 결혼식의 모습을 널리 알려줄 수 있는 자료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는 영조대에 혼인 의식을 재정비한 『국혼정례』와 『상방정례』가 만들어진 후 이에 준거하여 만들어진 최초의 의궤로서 조선시대 왕실결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조선의 최장수 집권왕 영조가 66세에 15세의 신부를 맞이한 사실도 흥미롭다. 15세의 신부 정순왕후는 순조대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국의 태풍으로 등장하는 여인이다.
『가례도감의궤』를 빼곡이 채우고 있는 당시의 기록들에서 왕실 혼인의 구체적인 모습과 함께 국가의 정치, 문화, 경제적 역량이 한데 집결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의궤 제작에 사용된 깨끗하고 질긴 종이, 정성을 드린 유려한 필체, 250여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깔끔하게 채색되어 전혀 변질되지 않은 그림 등은 문화재로서의 의궤의 가치를 보다 돋보이게 한다. 의궤는 우리 문화의 정수를 담고 있는 기록 유산으로서, 국제화 시대의 문화사절로도 손색이 없는 자료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진면목을 보여줄 수 있는 의궤와 같은 자료는 ‘가장 전통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다.
과연 상상만큼이나 화려했을까? 왕비는 어떻게 뽑았을까? 국왕의 결혼식은 일반 백성들의 결혼식 풍습과는 어떠한 차 이가 있으며, 혼수품으로는 무엇이 오고 갔을까?

2)가례 : 왕실의 결혼 축제
가례(嘉禮)는 원래 왕실의 큰 경사를 뜻하는 말로서, 왕실의 혼인이나 책봉 등의 의식예법을 뜻한다. 가례의 총체적 개념을 표시하는 『주례』에도 ‘이가례친만민(以嘉禮親萬民)’이라 하여 가례가 만민이 참여하여 행할 수 있는 의식임을 설명하였다. 그만큼 가례는 상하 모두가 함께 행할 수 있었던 의례라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기록된 『가례도감의궤』들이 모두 왕이나 왕세자의 결혼식을 정리한 기록임을 볼 때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가례는 곧 왕실의 혼인 의식, 그 중에서도 특히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의식을 뜻하는 용어로 볼 수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조선시대 가례도감의궤를 살펴보면, 왕의 가례가 9건, 왕세자의 가례가 9건, 왕세손의 가례 1건, 황태자의 가례가 1건이다.

현재 소장된 가례도감의궤를 볼 때 왕실의 혼인 중에서도 왕이나 왕세자의 혼인만을 특별히 가례라 칭했다는 것과, 이러한 혼인이 가지는 의미와 중요성을 널리 알리고 이를 기록으로 보존하는 취지에서 『가례도감의궤』를 편찬했음을 알 수 있다. 의궤는 다양한 주제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왕실의 결혼식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는 기록과 그림에서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배어난다. 따라서 기록된 내용들도 활기차고 신명이 나 있는 모습이며, 결혼 행렬을 그림으로 표현한 반차도를 꼭 부가하여 보다 생동감 있게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면면들에서 『가례도감의궤』는 조선시대의 의궤 중에서도 가장 화려함을 뽐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각 국왕과 왕세자의 결혼식이 시기적으로 연속되게 기록되어 있어서 의궤를 통하여 조선시대 결혼풍속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으며 각종의 혼수품과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변화 양상을 파악할 수 있다.
『가례도감의궤』에는 왕비의 간택(揀擇:왕비 후보의 선택)을 비롯하여, 납채(納采:청혼서 보내기), 납징(納徵:결혼 예물 보내기), 고기(告期:날짜 잡기), 책비(冊妃:왕비의 책봉), 친영(親迎:별궁으로 가 왕비 맞이하기), 동뢰연(同牢宴:혼인 후의 궁중 잔치), 조현례(朝見禮:가례 후 처음으로 부왕이나 모후를 뵈는 의식) 등 혼인의 주요 행사를 비롯하여, 혼인에 필요한 각종 물품의 재료와 수량, 물품 제작에 참여한 장인들의 명단, 행사와 관련하여 각 부서간에 교환한 공문서 등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화려하고 체계적으로 정리된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례도감의궤』는 조선시대 의궤의 꽃이라 칭할 만하다. 전통시대의 혼인이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혼인의 의식절차에 큰 비중을 두었음은 의궤를 통해서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데, 납채, 납징, 고기, 책비, 친영, 동뢰는 육례라하여 왕실 혼인 의식의 기본이 되었다. 육례의 의식 중에서도 국왕이 왕비를 모셔오는 친영의 장면을 그린 반차도를 말미에 포함시켜, 결혼식에 참여한 사람들의 모습이나 사용된 복식이나 의장기(儀仗旗) 등을 통하여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접할 수 있게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전기부터 왕실의 혼인을 위하여 『가례도감의궤』이 설치되고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가례도감의궤』가 편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조선전기의 의궤 중 현재 전해지는 것은 없다. 현재 전해지는 가례도감의궤 중 최초의 것은 1627년(인조 5) 12월 27일 소현세자(1612-1645)가 강석기의 딸 강빈(姜嬪)과 혼인한 의식을 정리한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자료:소현세자 가례 반차도:규장각 도록)이며, 순종과 순종비의 결혼식을 정리한 1906년의 『순종순종비가례도감의궤』가 가장 나중의 것이다. 280년간 20건의 가례가 의궤로 정리되어 있는 셈이다.
『가례도감의궤』가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는 곳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현재 규장각에는 20건 66종의 가례도감의궤가 소장되어 있으며(아래의 표 참조), 파리국립도서관에 13건이, 장서각에 11건 14책이 소장되어 있다. 규장각은 의궤의 보고(寶庫)라 할 수 있을 정도로 56여종 2,500여책의 의궤를 소장하고 있는데, 가례도감의궤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닌 것이다.
가례도감의궤는 크게 1책으로 제작된 것과 2책으로 제작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은 영조 때 『국혼정례 國婚定例』(1749년)와 『상방정례 尙方定例』(1752년)가 만들어진 후 의식절차가 보다 정밀하고 체계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의궤의 내용도 한층 상세해지고 분량도 늘어나게 되었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이후 2책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일반화 되는 것은 이러한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존하는 의궤 중에서는 『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에서부터 사도세자와 『장조헌경후가례도감의궤』까지는 1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부터는 혼인 행사의 전 과정을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2책으로 제작하였다.
이들 책은 특히 반차도의 내용에서 차이를 보인다. 1책으로 구성된 의궤의 반차도는 행렬이 8면에서 18면에 걸쳐 그려질 정도로 규모가 소략하고 왕비의 가마만이 그려진데 비하여, 2책으로 구성된 의궤의 반차도에는 왕과 왕비의 가마가 함께 그려지면서 46면에서 92면에 이르는 긴 행렬이 화면을 채우고 있다. 그만큼 조선후기로 오면서 가례 행사의 규모가 커지고, 행사의 내용이 보다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다.
奎章閣에 소장된 嘉禮都監儀軌
1. (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 <규13197,13198>1627년(인조 5) 1책
2. (仁祖莊烈后)嘉禮都監儀軌 <규13601> 1638년(인조 16) 1책
3. (顯宗明聖后)嘉禮都監儀軌 <규13071-13072>1651년(효종 2) 1책
4. (肅宗仁敬后)嘉禮都監儀軌 <규13078-13081>1671년(현종 12) 1책
5. (肅宗仁顯后)嘉禮都監儀軌 <규13084-13085>1681년(숙종 7) 1책
6. (肅宗仁元后)嘉禮都監儀軌 <규13089-13090>1702년(숙종 28) 1책
7. (景宗端懿后)嘉禮都監儀軌 <규13092-13093>1696년(숙종 22) 1책
8. (景宗宣懿后)嘉禮都監儀軌 <규13094-13096>1718년(숙종 44) 1책
9. (眞宗孝純后)嘉禮都監儀軌 <규13105-13107>1727년(영조 3) 1책
10.(莊祖獻敬后)嘉禮都監儀軌 <규13109-13111>1744년(영조 20) 1책
11.(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규13102-13104>1759년(영조 35) 2책
12.(正祖孝懿后)嘉禮都監儀軌 <규13114,규13115>1762년(영조 38) 2책
13.(純祖純元后)嘉禮都監儀軌 <규13122-13124>1802년(순조 2) 2책
14.(文祖神貞后)嘉禮都監儀軌 <규13130-13133>1819년(순조 19) 2책
15.(憲宗孝顯后)嘉禮都監儀軌 <규13139-13141>1837년(헌종 3) 2책
16.(憲宗孝定后)嘉禮都監儀軌 <규13142-13146>1844년(헌종 10) 2책
17.(哲宗哲仁后)嘉禮都監儀軌 <규13147-13151>1851년(철종 2) 2책
18.(高宗明成后)嘉禮都監儀軌 <규13153,13155-13157,15078>1866년 (고종3) 2책
19.(純宗純明后)嘉禮都監儀軌 <규13174-13178>1882년(고종 19) 2책
20.(純宗純宗妃)嘉禮都監儀軌 <규13179-13184,13186>1906년 (고종 33) 2책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는 원래 5부가 만들어졌다. 국왕의 어람용으로 1부를 바치고, 가례의 주무 부서인 예조에 1부, 4대 사고(史庫) 중에서 봉화의 태백산사고에 1부, 강릉의 오대산사고에 1부, 무주의 적상산사고에 각 1부씩을 나누어 올렸다. 어람용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현재는 파리의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필자는 2002년 1월 28일에서 2월 1일까지 외교통상부의 지원을 받아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의궤에 대한 실지 조사를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어람용으로 올려진『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파리국립도서관에 소장된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는 기록된 글씨와 그림은 분상용 보다 우수해 보였으나 표지와 장정이 원래의 형태가 아닌 재장장된 모습이었다.
규장각에는 예조, 오대산사고, 태백산사고에 보관했던 3부의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를 소장하고 있는데, 이 중 예조에 올린 도서번호 <규13104>본은 상책이 없는 결본이며, <규13102>본은 태백산사고 간행본, <규13103>본은 오대산사고 간행본으로 태백산사고 간행본과 오대산사고 간행본은 상, 하 2책으로 완질본이다. <규13102>본과 <규13103>본은 내용상에 있어서 미세한 차이가 나타나는데 이는 필사과정의 착오라고 여겨진다. 책의 보존상태는 오대산사고본인 <규13103>본이 가장 양호하다. 필자가 이책에서 주 자료로 삼은 것도 바로 이 오대산사고에 보관되었던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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