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국왕 혼인 행차의 구성분석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반차도를 중심으로
본 연구에서는 우선 왕실 축제의 모습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는 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班次圖)를 살펴보기로 한다. 반차도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혼인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오늘날 결혼식 기념 사진 또는 비디오 테이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반차도를 통해 참여인원이라든가, 의장기의 모습, 가마의 배치 등 결혼식 현장의 생생한 모습들을 접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하여 당시 결혼식에 직접 참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런데 반차도는 행사 당일에 그린 것은 아니었다. 행사 전에 참여 인원과 물품을 미리 그려서 실제 행사 때 최대한 잘못을 줄이는 기능을 하였다. 반차도는 오늘날 국가 행사나 군대의 작전 때 미리 실시하는 도상 연습과도 같은 성격을 띤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도 당시 친영일은 6월 22일이었지만 친영의 모습을 담은 반차도는 6월 14일날 이미 제작되어 국왕에게 바쳐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에는 모두 국왕이 별궁에 있는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친영 때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친영을 가례의 하이라이트라고 여긴 때문이다.
「반차」는‘나누어진 소임에 따라 차례로 행진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서 ‘반차도’는 행사의 절차를 그림으로 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차도에는 국왕의 대가(大駕) 앞을 호위하는 선상(先廂)과 전사대(前射隊)를 비롯하여 주인공인 왕비와 국왕의 가마 이들을 후미에서 호위하는 후상(後廂), 후사대(後射隊) 등과 행사에 참여한 고위관료, 호위병력, 궁중의 상궁, 내시를 비롯하여 행렬의 분위기를 고취하는 악대, 행렬의 분위기를 잡는 뇌군(헌병) 등 각종 신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임무와 역할에 따라 위치를 정하여 행진한다. 이들 중에는 말을 탄 인물의 모습도 보이고 걸어가는 인물의 모습도 나타난다. 여성들의 모습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말을 탄 상궁을 비롯하여 침선비(針線婢) 등 궁궐의 하위직 여성들의 모습까지 다양하다.
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모습은 뒷모습을 그린 것, 조감법으로 묘사한 것, 측면만을 그린 인물도 등 다양하다.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을 묘사한 것에서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행렬의 모습에 악센트를 주어 보다 생동감있는 모습을 연출한 화원들의 센스를 느낄 수 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물은 각 신분에 따라 착용하고 있는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이 이채롭다. 갖은 색깔의 옷의 모습과 너울을 쓴 여인의 모습이나 각종의 군복을 착용한 기병, 보병들의 모습은 당시의 복식 연구에도 귀중하고 생생한 자료가 될 것이다. 행렬의 분위기를 한껏 돋구는 의장기의 모습도 흥미롭다. 행렬의 선두가 들고가는 교룡기와 둑기를 비롯하여 각종 깃발과 양산, 부채류는 당시 왕실의 권위를 상징해 주고 있다. 수백명이 대열을 이루어가는 이 행렬은 바로 당시의 국력과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최대의 축제 퍼레이드였다. 그리고 이 행렬의 모습을 24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현장 그대로의 모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얼마나 큰 행운인가?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말미에 총 50면에 걸쳐 그려진 반차도의 각면은 45.8x33Cm이며 총 길이는 1,650 Cm에 달한다.
1) 빈차도의 제작자
반차도의 제작은 당대의 유명 화원들의 손에 맡겨졌다. 화원들의 명단은 각 방별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들이 각방에 소속되어 필요한 업무를 수행했음 의미한다. 화원들의 명단은 의궤의 공장질(工匠秩) 부분에 다른 장인들과 함께 기록되어 있다. 먼저 도청의궤의 도감공장별단(都監工匠別單)에는 화원 장벽만(張璧萬) 등 3인, 화원 현재항(玄載恒) 등 5인, 화원 허담(許) 등 8인이라 기록하여 참여 화원의 대체적인 모습을 기록하고 있으며, 일방의궤의 공장질에는 현재항, 이최인(李最仁), 이복규(李復圭), 신한동(申漢棟), 이필한(李必漢), 이광필(李光弼), 신덕흡(申德洽) 등 7명의 실명이 기록되어 있다 . 이방의궤의 공장질에는 장자징(張子澄), 한종일(韓宗一), 이필성(李必成), 김응환(金應환), 이도민(李道民), 이종욱(李宗郁), 허잡(許) 등 7명의 화원 명단이 보이며, 삼방의궤의 공장질에는 장덕홍(張德弘), 이필성, 한사근(韓師瑾), 장벽만 등 4인의 명단이 보인다. 이필성과 장벽만은 명단이 중복되기도 하는데, 이 명단으로 보아 대체로 16인 정도의 화원이 가례도감에 소속되어 반차도의 제작이나 각종 물품을 그리는 일에 참여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꼽고 있는 감홍도와 신윤복도 화원 출신의 화가이다.
이처럼 반차도의 제작에 도화서에 소속된 전문 화가들인 화원이 적극 참여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진이 없는 당시에 가장 생생하게 현장의 모습을 전달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화원들의 참여로 행사의 모습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반차도 제작에 전문 화원들이 참여함으로써 역사의 현장은 보다 정확하게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화원들은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개인적인 작품 활동 보다는 의궤나 지도제작과 같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화원들이 남긴 일반 감상화는 국가와 궁중의 각종 행사에 동원되고 남은 시간에 자신의 기량을 키우는 방편으로 그려진 것이 대부분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국가의 공식행사에서 차지하는 화원들의 역할이 커짐에 따라 이들에 대한 대우도 높아지기 시작하였다. 화원들은 국왕이나 유력한 벼슬아치들의 영정(초상화)도 직접 그리면서 그들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였다.
국가에 의해 화원들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게 되자 화원직은 점차로 세습되었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걸쳐 번성한 화원 가문은 양천 허씨와 인동 장씨, 경주 김씨, 배천 조씨 등으로, 이들은 17세기 이후 영향력 있는 중인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오늘날과 같이 사진이 없던 그 시절에 기록물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하는 욕구는 점차 증대되었으며, 이러한 국가적 욕구는 화원의 수요를 더욱 증가시켰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화원들의 활동은 당대의 역사적 산물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조선정부의 의지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시대 화원들의 그림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가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의궤의 반차도나 왕실의 기록화와 초상화, 지도에 보이는 그림 등에는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이 담겨져 있다.
조선후기의 초상화에 보이는 인물 그림에 나타나는 재미있는 현상은 곰보 자국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어린 시절 홍역을 앓았다는 증거이며, 당시 고관직을 지낸 사람들도 다수가 홍역을 앓은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이 홍역으로 크게 곤역을 치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의서 편찬은 당시 사회의 이러한 질병들의 피해를 막아보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으로 가던 상황을 기록한 병풍과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에는 18세기 후반의 사회상이 잘 나타나 있다. 임금의 행차를 백성들이 자유롭게 구경하고 행렬이 주변에는 임시로 좌판이 벌어지는 등 흥겨운 축제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때 정조가 한강을 건너기 위하여 설치한 주교(舟橋:배다리)는 당시의 높은 과학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19세기 화원들이 그린 작품 중 뛰어난 것으로는 1820년대에 100여명이 공동으로 제작한 『동궐도(東闕圖)』가 손꼽힌다. 『동궐도(東闕圖)』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각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그림은 가로 5.7m, 세로 2.7md의 초대형의 그림으로서, 서양화의 부감법과 평행사선 구도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동궐도(東闕圖)』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경기감영도』도 뛰어난 회화 기법이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대원군대에 작성된 1872년의 군현지도는 전국 각지의 화원들이 그 지방의 지도 제작에 참여한 사례이다. 그런데, 이 지도에는 당시의 국가정책인 쇄국정책의 이념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주목을 끈다.
작은 군현에 이르기까지에도 서양과의 통교를 반대하는 내용을 담은 척화비를 그려 넣은 것이나. 국방상 요충지에 해당하는 섬과 진(鎭)에 대해 자세한 내용을 표시한 것 등은 이러한 예이다. 또한 해남과 진도의 지도에 표시된 거북선의 모습, 천안지도의 관아건물에 표시된 태극무늬 등도 문헌자료에서는 접할 수 없는 당시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전달해주고 있다. 의궤의 반차도나, 지도와 기록화에 그려진 왕실 문화의 모습들은 현대에도 적극적으로 도입할 필요성이 있다.
조선시대의 화원들은 단순한 예술가가 아니었다. 이들은 우리의 역사를 보다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전해주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던 바로 역사의 전달자였던 것이다. 특히 왕실 결혼 축제의 모습을 담은 가례도감의궤 반차도를 제작한 화원들은 왕실축제의 또 다른 증인이자 기록자였던 것이다.
조선후기의 화원들이 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동원되어 국가의 기록화를 남기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현재 남아있는 각종 지도나 어진(御眞)의 제작, 국가의 기록화, 궁궐 단면도 등에 이들의 손길이 깊이 배어있는 것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조선후기 풍속화가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근한 김홍도는 국가의 기록화 제작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김홍도의 문하에 들어온 화원들은 ‘김홍도 사단’으로 불릴만한 체계적인 조직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들에 의해 수원능행도 등 국가 행사를 정밀히 보여주는 기록화가 완성되었다.
조선시대 화원들은 풍속화나 인물화를 제작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역할보다 국가의 행사기록이나 지도 제작에 자신들이 쌓은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오늘날 우리는 조선시대의 실상을 보다 사실적으로 접할 수 있다. 현재 규장각이나 국립중앙도서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에 소장된 화원들의 작품은 그 표현의 세밀성이나 정확성에 있어서 뛰어난 작품들이 많아 시각자료가 부족한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접해보는데 큰 도움을 준다. 각종 의궤에 기록된 반차도나, 대동강변에 냉면가(冷家)가 그려진 조선후기의 평양지도, 거북선이 표시되어 있는 진도(珍島) 지도 등은 화원들의 정밀한 눈을 통해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전해지는 작품으로서 당시에도 평양에 냉면이 유행했다는 것과 거북선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들 반차도는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다. 오늘날과 같은 물감이 없었던 당시 색채는 어떤 방식으로 낼 수 있었을까? 다행스럽게도 의궤에는 반차도 제작에 사용된 재료가 나타나 있다. 의궤에는 화원뿐만 아니라 각종 장인들이 사용한 재료를 모두 기록하고 있어서 전통시대 우리선조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물품을 제작했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가 있는데, 세밀한 부분까지 기록으로 남겨두는 우리 선조들의 투철한 기록정신을 엿볼 수 있다.
반차도 제작에 소용된 재료는 搗鍊紙(1권10장), 草注紙(1권), 楮注紙(4권), 出草白紙(1권), 太末(2升), 畵本次油紙(3장), 自作板(1닢), 黃毛(2오리), 紫硯(4面), 眞粉(10兩), 三碌(5량), 이靑(5錢), 3靑(5錢), 唐朱紅(3兩), 同黃(2兩), 靑花(3량), 片脂(2片), 稚羽(10개), 破油芚(1部), 土火爐(2坐), 아교(2兩), 白苧布(1尺), 白紬(1尺), 사기대접(沙大貼:10立), 沙鉢(3立), 貼匙(10立), 磁碗(2立), 沙莫子(2개), 보시기(甫兒:3개), 방구리(方文里:1개), 櫃(1部), 炭(7升), 黃筆(3柄), 眞墨(1丁) 등이었다. 이들 재료에서 삼록, 이청, 삼청 등은 천연물감에 해당되는 것으로, 칼라를 내는 데는 광물이나 식물의 천연재료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반차도의 그림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색되지 않고 천연색 특유의 색감을 나타내는 데는 이러한 천연 물감의 사용 때문일 것이다.
2) 빈차도의 구성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반차도에는 총 1,118명(보행인물 797명, 騎馬人物 391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반차도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는 왕의 행차를 뒷부분에는 왕비의 행차를 그렸다. 王의 연은 임시 가마인 부연(副輦) 다음에 배치되어 있으며, 왕비의 연 앞에는 왕비의 책봉과 관계된 교명(敎命),옥책(玉冊),금보(金寶),명복(命服)를 실은 교명요여, 옥책요여, 금보요여, 명복채여가 따르고 있으며 왕비의 연은 그림의 말미에 위치해 있다. 왕과 왕비의 연 전후에는 前射隊와 後射隊가 따르고 있다. 왕의 연은 사방을 열어 놓아 내부를 볼 수 없게 하였다.
혼인 행사를 주관하는 관리들인 도제조, 제조, 도청, 낭청 등 의정부 대신들과 호위를 맡은 무관들은 왕과 왕비의 연과 함께 중심부를 이루면서 행렬을 선도하고 있으며, 인물,말,의장기,의장물,여,연 등을 목판으로 새겨 도장을 찍듯이 인쇄하고 채색한 것이 흥미롭다. 반차도의 채색그림은 2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생생한 모습을 띠고 있으며, 당시의 복식과 의장 등의 물품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의장으로 구체적으로 사용된 품목은 깃발,산(傘),선(扇),부(斧),모절(節),창(槍)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그 가운데 의장기는 국가와 왕실의 상징적인 표시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의장의 핵심을 이루며 이들을 장엄하게 위엄을 갖추어 정렬하였다. 의장물 역시 직접적인 권력의 표시가 될 수 있는 도끼,칼,창 등 군사적인 요소가 큰 것과 우산,부채 등 상서로움을 나타내는 의장을 사용하여 절대적 통치자인 국왕의 위엄을 표시하였다.1)
반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인물들은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왕과 왕비의 가마를 중심으로 하여 후면도, 좌측면도, 우측면도의 다양한 기법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정조의 화성행차의 모습을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 행렬의 모습이 모두 측면도와 그려진 것과도 대조적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다양한 측면에서 인물의 모습을 그렸을까? 아마도 이 행렬에 참여하고 있는 각 부서의 인물을 구분할 수 있게 하여 담당 업무를 반차도상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게 하도록 했을 것이다. 반차도는 최초에 그려질 때 행사의 예행연습, 도상연습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결국 이러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차도라면 각 부서별,담당업무별로 인물을 쉽게 구분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러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의 모습이 포착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그려진 반차도는 한 각도에서 잡은 그림보다 훨신 생동감있고 입체적으로 보인다. 사람들의 행렬이 정지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로 치면 카메라를 여러 각도에서 잡음으로써 현장의 모습을 보다 생동감있게 보여주는 것과 같다. 국왕의 혼인이라는 거대한 축제의 행렬을 보다 사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이처럼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들의 모습을 담았던 당시인들의 지혜가 느껴진다.
3) 빈차도에 나타난 욍실의 결혼 모습
왕실의 결혼 모습을 그린 반차도는 모두 왕이 친히 왕비를 맞이하러 가는 의식인 친영(親迎)의 모습을 담고 있다. 친영의 축제의 가장 핵심으로 여긴 때문이다. 친영 행렬은 크게 아래와 같은 모습을 구성되었다.
① 전반부: 왕의 행차를 앞에서 인도하는 선상군병(先廂軍兵)과 독(纛:쇠꼬리로 장식한 큰 깃발), 교룡기(蛟龍旗:교룡을 그린 깃발, 교룡은 상상속의 큰 용) 등 왕을 상징하는 의장물로서 구성된 부분.
② 어가행차: 왕의 행렬을 이루는 부분 어가행렬의 앞에서 화려하고 장엄하게 어가의 출현을 알리는 부분. 각종 기치(旗幟)와 의장물을 들고 가는 의장병과 내취(內吹:악대),시신(侍臣)과 친시위(親侍衛) 의물 및 고취악대 등으로 구성됨.
③ 수행행차: 문무백관 등 호위 배종 신하들로 구성된 부분 어가의 뒤편에서 수행하는 어가를 수행하는 모습을 띰
④ 왕비행차: 왕비의 책봉에 관계된 교명, 금보 등을 실은 가마와 왕비의 가마, 왕비를 배종하는 궁녀들로 구성됨.
⑤ 후반부:행차를 마무리하는 부분. 후미에서 국왕을 경호하는 후하대 등으로 구성됨
한편 어가 행렬의 화려함과 함께 위엄을 돋보이게 하는 각종 장치가 활용되었는데 세부 내용으로는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었다.
① 의장기: 상징적인 표지 기능. 하늘, 해, 달, 산천, 사신도에 표현된 동물, 가구선인 등의 그림이 그려진 깃발.
② 의장물: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데 시각적인 것과 악기와 같은 청각적인 것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시각적인 것은 다시 창, 칼, 도끼 등과 같은 군사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과 그늘을 만들어주는 실용성과 신선들이 주로 사용했다는 상징성을 겸비한 부채인 선(扇), 양산(陽), 개(蓋) 등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③ 악기: 청각적인 요소인 악기는 행렬에 축제 분위기를 조성하고, 행렬의 선후 간에 동작을 일치시키는 기능을 하기도 함. 즉 오늘날 구령을 맞추는 것과 같은 기능을 함. 그러나 혼례식에서는 악기를 진열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는 것이 관행이었음.
④ 의례복: 행사에 동원되는 사람은 신분과 맡은 임무에 따라 각기 특징 있는 의례복을 착용하였다. 의례복은 형태나 색채에서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또한 여성들 등 일부는 너울과 같은 가리개를 착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⑤ 말: 행렬에서는 오늘날의 차량에 해당하는 말의 모습도 주목을 끈다. 행렬도 에서는 높은 신분에 있었던 인물이 말을 탄 것이 나타나는데 일부 내시와 여인들이 말을 탄 모습도 주목된다. 말은 백마를 비롯하여 회색, 적색계통 등 서로 다른 색깔을 띠고 있어서 다양한 품종이 행사에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행렬의 선두에 배치

먼저 선두에는 사령(使令)을 앞세우고, 당부관(當部官)이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당부관은 조선시대 오부의 담당관리를 말하는 것으로, 혼인 행사가 거행되는 부(部)의 담당관리가 차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394년(태조 3)에 한성을 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의 5부로 나누고 그 부내의 소송,도로,방화,택지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오늘날로 치면 구청과 같은 부서였다. 5부의 하부 행정단위로는 방(坊)이 있었는데, 중부 8방, 동부 12방, 남부 11방, 서부 8방, 북부 10방의 49방이 있었다.(마지막 페이지 한성부 방제 도표 참조) 방은 오늘날로 치면 동(洞)쯤으로 볼 수 있다. 5부는 모두 호조의 소관이었으며, 5부체제는 1894년의 갑오경장으로 폐지되었다. 별궁인 어의궁이 동부의 연화방에 위치한 것으로 보아, 당부관은 동부의 책임관리로 볼 수 있다. 당부관은 오늘날로 보면 구청장 급에 해당하는 인사라 할 수 있다.
당부관을 선두에 한 다음에는 사령과 서리 각 5명씩을 앞세운 경조당상, 예조당상, 호조당상의 말을 탄 모습이 선을 보인다. 경조는 한성부의 별칭이고, 당상관은 정 3품 당상이상의 관리가 해당되므로 한성부의 판윤(오늘날 서울시장)이나 좌윤·우윤(서울부시장)이 구청장 다음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이어 예조와 호조의 판서, 참판급의 인물이 뒤따르고 그 다음에 소유(所由:사헌부의 이속)와 서리(書吏) 5명씩을 앞세운 사헌부 당상이 나타난다. 사헌부 당상 다음으로는 사령과 서리 각 5명씩을 앞세운 병조당상의 모습이, 그 다음에는 나장(羅將) 5명과 서리 2명을 앞세운 금부도사(禁府都事)가 얼굴을 내민다. 오늘날로 치면 구청장 - 서울시장(또는 부시장)- 문화부장관(또는 차관) - 재정경제부장관(또는 차관) - 감사원장 - 국방부장관(또는 차관)- 검찰총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행사의 분위기를 돋구는 요소들

행사에 직접 관련이 있는 부서의 장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낸 다음에는 전사대, 대기수(大旗手), 취기수(吹旗手)가 행렬에 나타난다. 전사대는 총을 멘 모습, 대기수는 깃발을 든 자세이며, 취기수는 그림상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맡은 악기를 소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중앙과 좌우측면에 함께 그려져 있는데 중앙의 인물들은 후면도(後面圖)로, 좌우측의 인물들은 측면도로 각각 그려져 있다. 기수들 뒤에는 말을 탄 기고수차지(旗鼓手次知)가 보이는데 기수와 고수(鼓手)들을 지휘하는 인물이다. 기고수차지 뒤에는 북을 치는 2명과 금(金)을 치는 2명의 인물이 마주 선 상태로 행렬에 나타난다.
이들의 행렬 뒤로는 본격적인 호위병력의 모습이 보인다. 중앙에 훈련대장을 선두에 두고 교련관 5명이 말 탄 모습으로 있으며, 그 다음에 낭청 1명이 말 탄 모습이다. 이어 말을 탄 중군(中軍)이 앞에 가고 뒤이어 교련관 3명(기행)이 따르는 모습이 보이며, 대기수 1명, 북과 금을 치는 사람 각 2명과 말을 탄 기고수차지의 모습이 나타난다. 훈련대장에서 기고수차지로 이어지는 이들 인물은 화면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과 함께 좌우측에는 오늘날 헌병에 해당하는 뇌자(牢子) 좌우 각 2명을 선두로 하여, 순령수(대장의 명령,전달,호위를 맡고 순시기 또는 영기를 드는 군사) 각 2명, 대기수 각 4명, 취기구 각 3명, 뇌자 각 3명, 순령수 각 2명의 모습이 줄줄이 뒤를 잇고 있다.
이어서 둑(纛)이 선을 뵌다. 둑은 어가나 군대의 행렬 앞에 세우는 대장 깃발로, 큰 창에 소의 꼬리를 달거나 또는 창에 삭모(毛)를 달아서 만들며, 말을 탄 장교 한 사람이 이를 받들고 간다. 둑 다음에는 교룡기가 따른다. 교룡기는 어가행렬에서 둑 다음에 서는 큰 기로, 누런 바탕의 기면에 용틀임과 구름을 채색으로 그리고, 그 가장자리에는 화염(火焰)을 상징하는 붉은 헝겊이 달려 있다. 깃대의 머리에는 세 갈래의 창날이 있고 그 밑에 붉은 삭모가 달렸다. 군복을 입은 말 탄 장교가 잡고 4명의 군사가 깃대에 맨 줄을 한 가닥씩 잡아 다기는 모습이다. 둑과 교룡기는 국왕의 어가인 대가(大駕)가 나타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데, 둑과 교룡기의 등장 이후 행렬의 숫자가 훨씬 늘어나고 그 모습도 보다 화려해짐은 화면에서도 금방 드러난다. 서서히 본격적인 어가행렬이 시작되는 것이다.
행렬의 모습이 본격화되면서 이제까지 중앙과 좌우로 크게 3분되던 모습이 중앙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다 복잡하게 구성됨으로써 그림에 나타난 인물이나 의장의 모습도 조금씩 작게 그려지게 된다. 교룡기 다음의 중앙에는 주작기와 황룡기를 든 사람이 나타나며 이들 기수 좌우에는 홍개(紅蓋)를 든 2명의 사람과 금을 두드리고 북을 치는 사람 1명이 서 있다. 이어 보마(寶馬) 2필(갈색 1필, 흰색 1필)이 따르고 상서원 관원을 중앙에 두고 내시 2명이 말탄 모습으로 좌우에 배치되어 있다. 상서원(尙瑞院)은 궁중의 옥새,부패(符牌),절월(節鉞)을 관장하는 관청으로 역마를 내어 주기도 했다. 상서원 관원은 옥새를 비롯한 궁중의 상징적인 물품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또한 내시의 말 탄 모습이 주목되는데, 우리가 흔히 궁중의 최하위직이라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내시에게도 엄연히 품계가 있었고, 이들은 품계에 따라 말을 탈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이 되었다.
보마와 상서원 관원, 내시가 가는 좌우측에는 각종의 깃발행렬이 물결을 이루고 있다. 화면상에 드러난 깃발은 가구선인기, 봉황기, 홍문대기, 백호기, 현무기, 정사기, 정미기, 정축기, 백택기, 백학기, 삼각기, 용마기 등이다. 깃발 뒤에는 표골타와 웅골타를 들고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표골타는 붉은 칠을 한 봉에 머리를 둥글게 하여 표범가죽을 씌운 의장이며, 웅골타는 표골타와 모양이 같은데, 다만 표범가죽 대신에 곰 가죽을 씌운 것이다. 각각의 깃발과 표골타, 웅골타는 1인이 쥐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홍의(紅衣)에 피모자(皮帽子:가죽모자)를 착용하였다.
혼례에 사용되는 옷가지인 의대(衣)를 받쳐 든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이들 뒤에는 궁중의 옷을 공급하는 임무를 맡은 상의원 관원과 내시가 말을 탄 자세로 있다. 상의원 관원과 내시의 옆에는 청양산을 든 사람이 각각 따라가고 있다. 이어 중앙에는 천하태평기, 교의(交倚), 각답(脚踏), 군왕천세기(君王千歲旗), 각답, 관자(罐子), 우자(盂子) 등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 좌우에는 북과 청개, 홍개, 봉거(捧炬)를 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교의, 각답, 관자, 우자 등은 행사에 소용되는 물건들로서 말에도 싣지 않고 담당자가 직접 들고가는 모습이 이채롭다. 교의는 의식에 사용되는 의자이며, 관자는 양푼같이 생긴 그릇, 우자는 주전자 모양의 그릇이다. 물품을 들고 가는 이들의 좌우에는 각 7쌍의 말을 끌고 가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말은 색깔이 서로 다른데 백마가 4필, 흑마가 4필, 갈색마가 6필이다.
행렬의 최 가장자리에는 역시 깃발과 각종 의장물을 든 사람들의 물결로 넘치는데, 영자기, 금자기, 기서봉, 은등자, 금등자, 금장도, 은장도, 주작당, 청룡당, 금립과, 은립과, 금횡과, 은횡과, 금작자, 은작자, 뇌(牢), 정절, 정, 금월부, 은월부, 봉선, 작선, 용선 등 각종 의장물이 행사의 화려함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이들 의장물은 국가와 왕실의 존엄성과 신성함을 상징하고 있다. 각종 양산, 부채류는 그것이 지니는 신성한 의미와 함께 햇빛을 가리는 등 실용적인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행사에 필요한 의자나 각답을 손에 든 행렬의 뒤를 이어 중앙에 옥교(玉轎:임금이 타는 간단한 가마, 위를 꾸미지 않았음)가 나타나고 그 좌우측에는 부장(部將) 1명과 월도자비(月刀差備) 2명이 월도를 높이 쳐 든 상태로 화면에 선을 보인다. 그 뒤에는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선두로 하여 좌통례 1명, 인의(引儀) 2명, 우통례 말을 타고 뒤따른다. 사복시는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사복시의 책임자 정(正)은 정3품 직책이었다. 통례원은 국가의 의식이나 행사를 맡아보던 관청으로 좌통례, 우통례, 인의는 통례원의 관리들이다. 오늘날로 치면 의전 담당관으로 볼 수 있다. 국왕의 의전을 담당한 사복시정과 통례원 관리의 등장은 어가의 모습이 곧 나타날 것을 예고하고 있었다.
어가의 등장
이들의 뒤에는 바로 국왕의 가마인 연(輦)이 나타나지 않고 사고가 있을 당시를 대비해 제작한 빈 가마인 부련(副輦)이 따른다. 부련의 좌우측에는 각 10명의 창검군(槍劍軍)이 창을 높이 들고 행렬을 따라가고 있다. 부련의 뒤 중앙에는 수정장(水晶杖), 양산(陽), 금월부(金鉞斧)를 든 3명이 나란히 서고 이어 운검자비(雲劒差備) 2명, 인배(引陪) 2명이 뒤따른다. 그 뒤를 이어 옥당(玉堂)의 관원 4명이 말을 탄 자세로 가고 있고,그림 영조정순후가례도감 中 반차도 그 옆으로는 어마2필을 끌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옥당은 홍문관의 별칭으로, 홍문관은 궁중의 경서, 사적, 문서를 관리하고 왕을 자문하는 기능을 했다. 옥당의 관원 뒤로는 노란색 옷을 입은 내취(內吹) 8명의 모습이 보이는데 앞에 선 2명은 나발을 든 모습이다. 이들이 부는 나발 소리는 행렬의 흥취를 돋구고 행렬의 발을 맞추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내취의 좌우에는 별파진(別破陳) 각 7명이 포진해 있다.
내취의 뒤를 이어서는 사금(司禁), 무겸(武兼), 선전관(宣傳官), 총부낭청(摠部郎廳), 병조낭청(兵曹郎廳), 오위장(五衛將), 병조당상(兵曹堂上), 패운검(佩雲劒), 봉보검(捧寶劍) 각 2명씩이 말 탄 자세로 뒤따르고, 그 다음에 별군직(別軍職) 6명이 기행자세로 가고 있다. 별군직 다음으로는 어가의 앞에서 북을 두드리는 전부고취(前部鼓吹) 8명과 장악원의 관리인 전악(典樂) 1명이 서고, 촛불을 손에 든 봉촉(捧燭) 10명이 뒤따른다. 봉촉 뒤에는 별감 12명과 총을 소지한 무예별감 18명이 뒤따른다. 이 부분은 어가를 직접 수행하는 행렬인 만큼 호위 병력도 많아지고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등장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별군직, 전부고취, 봉촉, 별감 등이 중앙의 행렬을 차지하고 있는 동안 그 좌우에는 국왕의 경호 임무를 맡은 금군(禁軍)과 특별히 발탁한 군사들인 가전별초(駕前別抄), 장교복을 입은 호위군관, 가후별초(駕後別抄)가 말을 탄 자세로 수행하고 있고, 협연포수(挾輦砲手), 나장(羅將) 들이 창과 방망이를 들고 가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이처럼 국왕의 행차 길에는 경호에 관계되는 각종 부대원들이 총출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병력의 호위를 받은 채 드디어 국왕 영조가 탄 가마가 나타난다. 영조의 가마는 주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도록 개방형의 모습을 띠고 있다. 이처럼 왕의 가마가 개방적인 모습을 하고 있음으로 해서 백성들은 이날 국왕의 모습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당시 국왕의 모습을 볼 수가 없다. 국왕의 모습은 화면에 그려 넣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떠한 의식이나 행사에서도 왕이나 왕세자의 모습을 그려 넣지 않는 것은 조선시대의 관행이었다.
국왕의 가마 바로 뒤로는 청선(靑扇)을 받쳐 든 두 사람이 지나가고 이어 후방에 배치하는 깃발인 현무기를 가운데로 하고 양쪽에서 후전대기(後殿大旗)를 든 사람이 지나간다. 청선과 깃발을 쥔 사람의 좌우측에는 금부도사 2명과 무반직인 파총(把摠) 1명과 초관(哨官) 1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의 뒤로는 가마의 뒤에서 흥취를 돋우는 후부고취(後部鼓吹) 10명이 붉은색의 복장을 한 상태로 행렬을 따라가며 협연장(挾輦將), 전악(典樂), 내시, 사복시에서 말과 수레를 담당한 내승(內乘), 행여 있을 지도 모를 국왕의 병환에 대비한 어의(御醫)의 모습이 선을 뵌다.
이어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의 관리들이 행렬을 뒤따른다. 사령 5명과 서리 5명을 앞세우고 비서실장격인 도승지가 나타나며 이어 승지 4명과 사관 4명이 말을 탄 자세로 나타난다. 사관 4명이 따르는 것은 이 행사를 역사의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관의 뒤로는 약방 도제조와 제조가 뒤를 따르며 혹시라도 있을 국왕의 신병에 대비하였다. 이어 말을 탄 장교 1명과 4명의 병사가 끈을 잡은 표기(標旗)가 등장하며, 총부낭청과 총부당상, 병조낭청과 병조당상, 나장 5명을 거느린 금부도사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들의 좌우측에는 창검군 20명이 좌우에 배치되어 긴 창을 들고 행렬을 따른다.
금부도사 뒤로 화면의 좌측에는 동반 10명 서반 10명씩의 관리가 말을 탄 자세로 가는데 10번째에 해당하는 곳에는 각각 감찰이 말을 타고 있다. 이어 금부도사 2명이 말을 탄 자세로 나장 5명을 앞세우고 나타나며 국왕을 호위하는 후사대 병력이 좌우측에 배치되었음이 나타난다. 중앙에는 후사대기, 초관, 깃발을 든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전사대의 복장이 푸른 바탕에 붉은색 조끼 같은 것을 입은데 비하여, 후사대 병력은 푸른 바탕에 붉은색 조끼 같은 것을 입은 모습이다. 왕비를 호위하는 전사대, 후사대의 모습도 국왕을 호위하는 전사대, 후사대의 모습과 같다.
왕비 가마 행렬의 등장
후사대의 병력 배치를 마지막으로 국왕 가마의 행렬이 일단 끝이 나면 왕비의 가마 행렬이 뒤를 따른다. 친영은 국왕이 별궁인 어의궁에 가서 이곳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왕비를 이제 궁궐 안으로 모셔오는 의식이다. 따라서 전반부는 국왕의 가마 행렬로 후반부는 왕비의 가마 행렬로 채워지는 것이다.
왕비 가마의 행렬은 전사대 깃발을 앞세운 전사대장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전사대장 뒤로는 전사대기를 든 병사들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들의 좌우측에는 전사대 병력이 화면을 채운다. 이어 왕비의 가마가 나타나기 전에 왕비의 책봉과 관련된 교명, 옥책, 금보, 명복을 담은 4개의 가마가 먼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왕의 혼인 명령에 해당하는 교명(敎命)을 담은 교명요여(敎命腰輿)가 나타나는데, 교명요여 앞에는 교명문을 놓아 둘 욕석과, 배안상을 들고 가는 사람과 충찬위(忠贊衛) 2명이 모습을 선보인다. 충찬위는 공신의 자손들로 편성된 군대로서 국가의 주요한 행사에는 이들 국가 유공자들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충찬위는 집사의 역할을 하였다. 충찬위 뒤로 8명의 가마군이 멘 교명요여가 나타나고, 이들의 뒤에는 교명의 운반을 담당한 교명자비(敎命差備) 1명과 자리를 담당한 욕석자비(褥席差備) 2명, 행사를 진행하는 거안자(擧案者) 2명및 내시 5명이 말 탄 자세로 따라오고 있다.
교명요여 다음으로는 왕비의 존호를 올릴 때 송덕문을 옥에 새겨 놓은 간책(簡冊)인 옥책을 담은 가마가 나타난다. 가마의 앞에는 교명요여 때처럼 옥책을 읽는 독책상(讀冊床), 욕석, 배안상을 든 사람과 충찬위 2명의 모습이 선을 보인다. 이어 8명의 가마군이 멘 옥책요여가 나타나고 가마의 뒤를 이어 옥책을 담당한 옥책자비(玉冊差備) 1명과 자리를 담당한 욕석자비(褥席差備) 2명, 독책상을 담당한 독책상자비 2명, 행사를 진행하는 거안자(擧案者) 2명과 내시 7명이 말 탄 자세로 따라오고 있다.
다음에는 금보채여가 등장한다. 채여는 채색의 무늬가 있는 가마로 요여 보다는 훨씬 화려한 맛이 있다. 금보와 같은 귀한 도장이나 명복과 같은 의복은 화려한 채여에 담고 있다. 금보채여가 나타나기 전에 먼저 2사람이 보마(寶馬)를 끌고 가고 있고, 이어 금보를 읽는 독보상(讀寶床), 욕석, 배안상을 든 사람과 충찬위 2명의 모습이 선을 보인다. 이어 8명의 가마군이 멘 금보채여가 나타나고 가마의 뒤를 이어 옥책을 담당한 금보자비(金寶差備) 1명과 자리를 담당한 욕석자비(褥席差備) 2명, 독보상을 담당한 독보상자비 2명, 행사를 진행하는 거안자(擧案者) 2명과 내시 7명이 말 탄 자세로 따라오고 있다. 이어 배안상과 충찬위 2명이 나타나고 명복채여(命服彩輿)가 모습을 드러낸다. 명복은 명에 따라 입는 의복을 지칭한다. 명복채여 뒤에는 명복자비(命服差備)와 행사를 진행하는 거안자(擧案者) 5명과 내시 5명이 말 탄 자세로 따라오고 있다.

왕비의 가마에 앞서 지나가는 4개의 가마에는 왕비의 책봉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문서, 도장, 의복이 담겨있다. 왕비의 책봉을 신성시하는 의미에서 관련된 문서나 도장을 모두 가마에 담았던 것이다. 이들 가마가 먼저 지나가면 좌우측에는 호위 병력인 금군, 오위장, 선전관 등이 무장한 상태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어 중앙의 행렬에는 은관자, 은우자, 은교의, 은각답 등 행사에 필요한 물품을 직접 든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나며 이들의 옆에는 장마(仗馬) 2필과 청개, 홍개를 든 사람들이 행렬을 따른다.
또한 좌우측에는 국왕의 가마행렬과 마찬가지로 각종 의장기를 든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룬다. 백택기, 은등자, 금등자, 금장도, 은립과, 금립과, 은황과, 금횡과, 모절, 은월부, 금우러부, 작선, 봉선을 높이 쳐든 사람들은 모두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의장 행렬의 뒤 중앙에는 봉거(捧炬)를 밝힌 4명의 인물과 양산을 받쳐 든 사람이 따른다. 양산을 받쳐 든 사람 뒤로는 악공고취(樂工鼓吹)라고 하여 피리, 가야금, 나팔 등 각종의 악기를 든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의궤의 기록에는 ‘다만 진열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는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기록대로 따랐다면 이들은 의식에 필요한 악기만을 소지하고 연주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악공의 뒤로는 물건을 멘 지가(支架) 4명과 별감 10명이 따른다. 봉거와 악공고취가 중앙의 행렬을 취하며 혼례의 분위기를 한껏 높이는 동안 그 좌우측에는 붉은 몽둥이를 든 내시와 나장, 금부도사, 궁중의 어린 내관인 귀유치(歸遊赤內官)와 보행내관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어 촛불을 밝힌 10명의 인물과 너울을 쓴 기행나인(騎行內人) 4명, 수줍게 걷고 있는 보행나인 8명, 너울을 쓴 기행 상궁 2명, 향자비(香差備) 1명, 별감 2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들 바로 뒤에 오늘의 주인공인 왕비의 가마가 12명의 가마군에 의해 점차 화면의 중앙에 다가선다. 너울을 쓴 말탄 시녀 12명과 의녀 2명은 좌우측면에서 왕비의 가마를 거의 병렬해서 따라가고 있다. 왕비의 가마 뒤로는 청선을 높이 치켜 든 2명의 인물이 나타나며, 바로 뒤에는 연배여군(輦陪餘軍)이 손을 맞잡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12명의 가마군과 임무를 교대하기 위한 예비 가마군이다. 이어 사복시정을 가운데 두고 내시 4명과 의관 4명의 말 탄 모습이 나타나며, 긍지 2명, 사관 2명, 병조당상과 낭청, 총부당상과 낭청의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의 좌우측에는 부장(部將), 수문장(守門將), 내금위(內禁衛) 등 호위 업무를 맡은 관리들이 행렬을 따르고 있다.
행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사람들
왕비의 가마 후미에는 이 행사를 총괄적으로 준비한 가례도감 도청의 관리들의 모습이 선을 뵌다. 도감 사령 5명과 서리 5명을 선두에 두고, 사령 2명을 앞세운 도제조가 나타난다. 이 행사의 총책임자격인 우의정 신만이다. 이어 사령 5명을 앞세우고 제조 3명, 호조판서 홍봉한, 예조판서 홍상한, 병조판서 조운규가 말 탄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어 사령 4명, 도청 2명, 사령 5명, 낭청 5명, 사령 5명, 이 행사의 감독관인 감조관 7명의 모습이 나타난다. 이 행사를 준비하고 관리·감독한 사람들의 실명(實名)은 의궤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들 행사의 준비자들 뒤로는 동반 9명과 감찰 1명이 행렬의 좌측에서 말을 타고 가는 모습과 서반 9명과 감찰 1명이 행렬의 우측에서 말을 타고 가는 모습이 화면에 나타난다. 이어 화면의 중앙에 후사대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말을 탄 후사대장, 깃발을 들고 총으로 무장한 후사대 병력이 뒤를 따른다. 왕비 행렬을 후방에서 경호하는 후사대 병력은 이 반차도의 대미를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행렬에 사용된 각종 깃발과 의장
행렬에 사용된 각종 깃발과 의장의 구체적인 모습은 어떠했을까? 『세종실록』2)의 오례· 가례서례(嘉禮序例)의 노부 항목에는 조선시대부터 사용된 각종 깃발과 의장의 모습이 자세히 그려져 있어서 참고가 된다.
국왕의 행렬이 지나가던 거리 모습은 어떠했을까?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국왕의 친영 행렬은 창경궁의 홍화문을 나와, 이현고개 앞을 거쳐 별궁이 있는 어의궁(현재 종로구 연지동)으로 가 친영 의식을 행하고 돌아올 때는 종묘 앞 동구와 파자전 앞 석교(지금의 단성사 부근)를 지나 창덕궁 돈화문으로 돌아오는 코스를 지났다고 하고 있다. 즉 종루거리와 이현고개를 지났음이 나타나는데, 종루와 이현은 당시 최대의 시장이었다. 『경도잡지』의 시포(市)조에는 ‘서울 장안에는 비단,명주,종이,베 등을 파는 큰 점포들이 종가(鍾街)를 끼고 양쪽에 죽 늘어서 있고, 그 이외에는 각처에 흩어져 있다. 장을 보러 가는 사람은 대개 새벽에는 이현과 소의문(昭義門: 현 서울 서소문 근방) 밖으로 가고, 점심때는 종가로 모인다.’는 기록이 있고 『한경지략』의 시전조에도 ‘성안의 종루,배오개(이현)와 남대문 밖의 칠패, 팔패가 제일 큰 저자거리이다’라 하여 종로거리와 이현 일대는 조선시대에도 최고의 시장이자 번화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를 살아간 실학자 이덕무(李德懋:1741-1793)가 서울의 모습을 찬양한 시 『성시전도시(成市全圖)』에는 당시 종루 큰 길의 정경이 담겨져 있다.
원각사에 우뚝 솟은 흰 탑은
열 네 층을 공중에 포개었고
운종가에 있는 흥천사 큰 종은
큰 집 가운데에 날 듯이 걸렸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갔다가 또 오는 사람들
인해(人海) 망망(茫茫) 끝이 보이지 않네
만인의 마음을 내 알겠노니
가난한 자는 돈 구하고 천한 사람은 벼슬 구하네
어진 사람 어리석은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 날이면 날마다
오극삼조3)(五極三條)로 개미떼처럼 모여든다
가벼운 초헌 지나는 곳에 노복들 소리치며 길을 피하게 하고
작은 가마 돌아갈 때 계집종들이 옹위한다
한가한 저 공자(公子) 어찌 그리 사치스러운고
말의 안장 휘황찬란 화려함을 다투네
... ...
거리 좌우로 늘어선 천간의 집에
온갖 물화 산가이 쌓여 헤아리기 어렵구나
비단가게에 진열한 울긋불긋한 것은
모두 능라(綾羅)이고 면수(綿繡)로다
어물가게에 싱싱한 생선은 살도 쪘네
갈치 농어 준치 쏘가리 숭어 붕어 잉어 따위
쌀가게에 쌓인 쌀 반과산(飯果山)과 같구나
운자(雲子)같은 흰밥에 기름이 흐른다
술 파는 주점이야 본시 인간 세상의 것
웅백(熊白) 성홍(猩紅) 술빛깔 잔에 넘치네
행상하며 좌고(坐賈)하며 셀 수도 없이 많고 많아
자질구레한 물건이라도 갖추지 않은 것이 없네
(김영상, 1996 『서울육백년 4』 대학당 244-245쪽 참조)
이처럼 18세기 중반의 서울 종루 거리는 인파가 들끓고 물산이 넘쳐 나는 활기찬 도시였다. 종루의 중심을 지났던 영조의 혼인 행렬은 수많은 상인과 관람객들에게 의해 그 모습이 목격되었을 것이고 이들은 일생에 한 번도 경험하기 어려운 국왕의 결혼 축제 행렬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는 잡인의 출입을 엄금한다는 내용이 나타나 당시 밀려드는 인파들을 통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정조가 화성을 다년 온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한 8폭의 기록화 『수원능행도』에는 왕의 행차를 구경하는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화면에 담겨져 있다. 이들 관중들 속에 떡과 엿을 파는 떡장수 아주머니와 엿장수 총각이 쉽게 목격되는데 이러한 그림 속에서 왕의 행차는 하나의 축제였고 이러한 축제를 맞아 물건을 팔려는 행상들이 몰려들었던 상황을 생생히 확인할 수가 있다.
왕실 축제의 의미
이처럼 조선시대 왕실축제의 모습은 『가례도감의궤』로 대표되는 의궤의 기록과 당시의 핵심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한 반차도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었다. 왕과 왕비의 모습을 비롯하여 관리, 상궁, 나인, 내시 등 각계 각층의 다양한 인물들이 행사에 직접 참여하는 모습과 각종의 의장기와 악기의 실제 모습도 접할 수가 있었다.
이외에 의궤의 기록에는 결혼과 같은 왕실 축제 행사에 인원과 물품을 동원하는 과정이라든가 행사 비용을 최대한 절약하려는 모습, 사관이나 화원들로 하여금 행사를 철저하게 기록하려는 모습 등 선조들의 문화와 사상을 직접 느낄 수 있는 자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조의 화성행차를 담은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와 『수원능행도』와 같은 기록화에는 왕실 축제에 인근의 백성이 참여하여 한껏 축제분위기를 돋구어 나간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왕실의 결혼이나 국왕의 행차 등으로 대표되는 조선시대 왕실문화는 볼거리가 별로 없었던 당시에 축제의 분위기를 고양해 주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철저하게 기록하여 오늘날 우리들에게 당대의 문화전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왕실축제에 나타난 선조들의 전통문화의 장점과 우수성을 살려 현대에 재음미해 나가는 작업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고취시켜 나가는 주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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