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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화성행차와 8일간의 행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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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성행차의 의미

1795년 윤2월 9일 새벽, 정조는 창덕궁을 출발하여 화성을 향했다. 정조가 화성을 방문하는 것은 이 때은 처음이 아니었다. 정조는 1789년에 자신의 생부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원부(水原府)가 있던 화산(花山) 아래에 모시고 현륭원(顯隆園)이라명명한 이후 매년 이 곳을 방문한 바 있었다. 그러나 1795년은 정조에게 있어 특별한 의미가 있는 해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해였던 것이다.
게다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는 동갑이었으니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더라면 함께 회갑 잔치를 올려야 하는 해이기도 했다. 또한 한 해 전에 공사를 시작한 화성(華城)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국왕이 직접 공사 현장을 둘러볼 필요도 있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에서 자신의 권위를 펼쳐 보일 필요성도 느꼈다. 이에 따라 정조는 조선왕조를 통틀어 가장 성대하고도 장엄한 행사를 기획하게 되었다.
정조가 국왕으로 있던 18세기 후반은 조선의 문예부흥기로서 사회 각 분야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기였다. 또한 이 시기는 세계사적으로도 역동적으로 움직이던 시대였으니, 미국이 신생국가로 탄생하여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으로 즉위하고,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나 근대 시민국가가 등장하였다. 또한 중국에서는 건륭(乾隆, 1736∼1795) 황제가 즉위하여 청나라 최대의 융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때 정조는 아버지의 비극을 빚은 붕당정치를 극복하고 재야의 선비와 백성을 적극 포용하는 민국(民國)을 건설하며, 농업과 상공업이 함께 발전하는 새로운 경제질서를 구축하려 하였다. 또한 정조는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여 군권(軍權)을 장악하고, 주자 성리학으로 도덕성을 높이며, 청으로부터 새로운 기술과 경영방식을 도입하여 부강하고 근대화된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정조의 화성 행차는 이러한 꿈을 펼치는 시금석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모신 화성을 자주 방문하여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능행길은 현륭원에 참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성을 오가는 길에 일반 주민들의 민원을 살피고 이를 해결하는 기회로 활용하였으며, 지방에 숨겨진 인재를 발탁하여 관리로 등용했다. 또한 경기도 일대를 직접 방문하여 수도권의 방위 체제를 점검하고, 수시로 군사들을 동원하여 단체 훈련을 시켰다.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정조가 그동안 이룩했던 자신의 위업을 과시하고 신료와 백성들의 충성을 결집시켜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에 더욱 박차를 기하기 위한 정치적 행사였다. 정조는 이 행사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을 따르는 친위세력을 하나로 묶고, 장차 화성을 중심으로 펼쳐가려고 하는 개혁정치의 구상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2)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편찬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는 말 그대로 '을묘년(1795년)에 현륭원에 행차한 내용을 정리(整理)한 의궤'이다. 정조는 1794년 12월에 이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란 관청을 설치한 바 있는데, '정리의궤'란 '정리소의 업무를 정리한 의궤'를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정리의궤』는 또한 활자로 인쇄한 최초의 의궤이다. 조선시대의 의궤는 사람이 직접 손으로 쓰고 그림을 그린 필사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정조는 『정리의궤』를 널리 알리기 위해 활자로 인쇄할 것을 결정했고, 그 인쇄를 위해 특별히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1795년에 만들어진 이 활자는 '정리자(整理字)'라고 하는데, 이는 『정리의궤』의 인쇄를 위해 만든 활자라는 뜻이다. 정리자는 이러한 연유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후 정조와 관련이 깊은 서적을 인쇄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1814년에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를 정리자로 인쇄한 것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정리의궤』는 권수(卷首) 1권, 본문 5권, 부록 4권 등 총 10권 8책으로 구성되었다. 권수의 내용은 주로 도식(圖式) 즉 그림이다. 여기에는 화성행궁의 전경, 봉수당(奉壽堂)의 잔치, 잔치 자리에서 공연된 무용, 잔치 자리에 사용된 조화, 그릇, 복식, 화성에서의 주요 행사 장면, 행사에 사용된 가마의 모양과 세부도, 그리고 행렬 전체의 모습을 그린 반차도가 나온다. 이 그림들은 『정리의궤』의 백미가 되는 부분으로 김홍도를 비롯한 궁중의 화원들이 그린 것을 목판으로 새겨서 인쇄한 것이다.
본문에는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내용, 행사에 사용된 글들, 의식 절차, 행사와 관련한 관리 및 관청의 보고서, 잔치 음식의 내용과 조달 상황, 국왕과 혜경궁이 타고 간 가마의 재료와 비용, 배다리 설치, 행사에 참여한 내빈(內賓, 여자손님)과 외빈(外賓, 남자손님) 및 군인의 명단 등이 수록되어 있다. 우리가 오늘날 정조의 화성 행차와 회갑잔치를 원형에 가깝게 재현할 수 있는 것도 이처럼 풍부한 기록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비의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정리한 재용(財用)에서는 모든 비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물가 동향을 이해하는데에도 크게 도움을 준다.
부편에는 혜경궁의 진짜 생일날인 1795년 6월 18일에 창경궁 연희당(延禧堂)에서 열렸던 회갑잔치, 1월 21일 사도세자의 회갑일에 사도세자의 신위(神位)를 모신 경모궁(景慕宮)에 정조가 참배한 일, 태조 이성계의 아버지인 환조(桓祖)의 탄신 8회갑(480주년)을 맞아 정조가 영흥본궁(永興本宮)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린 일, 1760년 사도세자가 충청도 온양행궁에 가서 심은 느티나무가 35년만에 큰 나무로 성장한 것을 기념하여 영괴대비(靈槐臺碑)를 세우고 당시 세자를 수행한 관원에게 상을 내린 일 등을 정리했다. 이 네 가지 행사는 조선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사도세자와 혜경궁의 회갑을 축하하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정조의 화성행차에 관한 기록은 이외에도 많이 남아 있다. 『원행정례(園行定例)』라는 책이 있는데, 이는 1789년 이후 매년 있었던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된 사항을 정례화하여 정리한 것이다. 또한 1795년의 행사를 8폭의 그림으로 그린 『화성능행도』 병풍이 있는데, 이는 『정리의궤』에도 나오는 주요 행사 장면을 천연색으로 그린 명품이다. 『화성능행도』 병풍은 현재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 호암미술관,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박물관 등에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규장각에는 '수원행행반차도(수원행행반차도)'라는 천연색 두루마리 그림이 있다. 이는 『정리의궤』의 반차도와 같은 내용인데, 『정리의궤』의 그림이 행렬을 옆에서 본 모양을 그린 것이라면 이는 행렬을 뒤에서 본 모양을 그린 것이다. 최근에는 이상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의궤』의 반차도에 채색을 한 『정조대왕화성능행 반차도』가 서울대학교 한영우 교수에 의해 제작되어 시중에 널리 보급되어 있다.

3) 7박 8일간의 주요 행사
1795년 윤2월 9일, 창덕궁을 출발한 정조의 행렬은 7박 8일간의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 그러면 이 때의 행사는 과연 어떠한 것이 있었을까? 당시 화성에서 있었던 주요 행사를 날짜별로 살펴보자.

정조의 화성행차는 1794년 12월부터 준비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행사를 주관할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행사 경비로 10만냥을 마련하였는데 모두 정부의 환곡을 이용한 이자 수입이었다. 환갑을 맞이한 혜경궁 홍씨가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특별하게 설계된 가마가 2개 제작되었고, 행사에 사용할 비단은 중국제를, 거울은 일본제를 사용하였다. 또한 1,800여명의 행렬이 이동할 수 있는 시흥로(오늘날의 1번 국도)를 새로 건설하고, 한강을 안전하면서도 적은 비용으로 건널 수 있도록 고안한 배다리가 건설되었다.
본 행사는 1795년 윤2월 9일에 시작되었다. 반차도에 나타난 인원은 1,779명이었으나 현지에 미리 가 있거나 도로변에 대기하면서 근무한 자를 포함하면 6,000명에 이르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새벽에 창덕궁을 출발한 일행은 노량진을 통해 배다리를 건너 노량행궁(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먹었고, 저녁에 시흥행궁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휴식 시간에 간식을 먹거나 정식 식사를 할 때에는 음식의 그릇 수, 들어간 재료와 음식의 높이, 밥상을 장식한 꽃의 숫자까지 표시되었다.
둘째 날인 윤2월 10일에는 시흥을 출발하여 청천평(맑은내들)에서 휴식을 하였고, 사근참행궁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무렵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정조는 길을 재촉하였고, 진목정에 이르러 잠시 휴식한 다음 저녁에 화성행궁에 도착하였다. 행렬이 화성의 장안문을 들어갈 때에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군문(軍門)에 들어가는 절차를 취하였다.
다음 날인 윤2월 11일, 정조는 아침에 화성향교의 대성전에 가서 참배를 하고, 오전에는 낙남헌으로 돌아와 수원과 인근의 거주자를 대상으로 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여 문과 5인, 무과 56인을 선발하였다. 오후에는 봉수당에서 회갑 잔치를 예행 연습하였다. 정조는 특히 나라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잔치에는 숙련된 기생을 쓰지 않고 바느질하는 종이나 의녀(醫女)들을 동원하였는데, 이들의 춤 솜씨가 은근히 걱정되었다.
윤2월 12일에는 아침에 현륭원에 참배를 하였다. 남편의 무덤을 처음 방문한 혜경궁 홍씨의 슬픔이 너무 큰 것을 보고 정조는 조급하고 당황해 하였다. 오후에 정조는 화성의 서장대에 올라 주간 및 야간 군사훈련을 직접 주관하였다. 화성에 주둔시킨 5천명의 친위부대가 동원된 이 날의 훈련은 서울에 있는 반대세력에게 엄청난 시위 효과가 있었다.
윤12월 13일은 이번 행차의 하이라이트인 회갑연이 거행되었다. 연회 장소의 좌석 배치와 가구들, 의식의 진행 절차, 잔치에 참가한 여자손님 13명과 남자손님 69명의 명단이 소개되었다. 또한 잔치에 쓰여진 춤과 음악, 손님에게 제공된 상의 숫자와 음식, 소요 경비가 열거되었다.
윤2월 14일에는 화성의 곤궁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베풀었다. 서울에서 정조와 같이 온 관료 15명과 화성의 노인 384명이 참가하였는데 정조와 노인들의 밥상에 오른 음식이 동일하였다. 양로연을 끝으로 공식 행사는 끝났다. 이후 정조는 휴식으로 들어갔는데, 한낮에는 화성의 축성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방화수류정을 시찰하고, 오후에는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하였다. 활쏘기의 성적은 정조가 제일 좋았다.
윤2월 15일은 서울로 출발하는 날이었다. 정조는 오던 길을 돌아서 시흥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잤고, 윤2월 16일에는 노량을 거쳐 서울로 돌아왔다. 시흥을 출발하면서 정조는 백성들의 민원을 직접 듣고자 하였다. 정조가 백성들을 만나 고충을 이야기 할 것을 권유한 끝에 금년에 호역(戶役)에 두 번이나 징발된 폐단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고, 정조는 이를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4) 빈차도에 나타난 행렬의 모습들

『정리의궤』에는 정조의 행렬이 63면의 반차도로 정리되어 있다. 당대의 화가였던 단원 김홍도(金弘道)가 지휘하고 김득신(金得臣), 이인문(李寅文), 장한종(張漢宗), 이명규(李命奎) 등 당대의 일류 화원들이 제작한 이 그림은 절정기에 오른 진경문화(眞景文化)의 진수를 잘 보여준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를 중심으로 하는 이 행렬에는 1,779명의 사람과 779필의 말이 참여하였고, 악기를 연주하는 악대가 115명, 각종 의장용 깃발을 든 사람도 238명이나 포함되어 있다.
행렬은 전체적으로 질서정연하면서도 인물 개개인의 표정이나 동작, 깃발이 휘날리는 정도가 다르게 표현되어 있어 자유분방한 느낌을 준다. 실록에서는 정조의 정치가 '모든 일을 옳은 방향으로 처리하여 그의 교화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궁궐 안이 엄숙하고 질서정연하면서도 화기(和氣)가 넘쳐흘러 각자 자기 도리를 다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반차도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제 반차도를 따라 그 날의 행렬을 살펴보기로 하자.
제일 앞에 경기감사 서유방(徐有防, 1741∼1798)이 보인다. 서유방이 행렬의 선두에 선 것은 행차의 목적지가 그의 관할 구역인 경기도 화성이었기 때문이다. 서유방은 정리소의 정리사(整理使)이자 경기감사의 자격으로 행렬을 인도하였다. 그 다음에 1795년의 행사를 총괄했던 총리대신(總理大臣)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있다. 채제공은 당시 정조의 신임을 가장 크게 얻고 있던 정치적 실력자로서 생부(生父)인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복권시키고 화성을 건설하려는 정조를 실무적으로 뒷받침한 정조의 측근 인사였다. 채제공의 뒤로는 별기대(別騎隊) 84명과 각종 깃발을 든 군사가 따르고, 징, 나팔, 호적, 해금, 장고, 북, 피리 등으로 구성된 악대가 따른다. 정조의 행렬에는 악대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전체 행렬의 보조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행렬을 웅장하게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다음에는 병기로 무장한 훈련대장(訓練大將)과 금군별장(禁軍別將)이 따르고, 차비선전관(差備宣傳官)의 호위 하에 국왕의 어보(御寶)를 실은 말이 지나간다. 그 뒤에 베일로 얼굴을 가린 18명의 나인(궁녀)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데, 이들은 회갑 잔치에서 각종 무용을 공연할 무용수였다. 궁녀들이 궁궐 밖을 출입할 때에는 얼굴을 가리고 다녔음을 알 수 있다. 궁녀 뒤로 혜경궁의 옷을 실은 말이 차지장교(次知將校)의 호위 하에 지나가고 있다.
이제 행렬은 국왕의 가마가 있는 곳에 이른다. 수어사(守禦使) 심이지(沈 之)가 50명의 기병을 선도하며 지나가고, 그 뒤에 각종 의장기가 늘어 선 사이에 정조의 가마를 끌고 갈 예비 말 4필이 있다. 다음에 정조가 타기로 예정되어 있는 어가(御駕)가 나타나는데, 실제로 정조는 이 가마를 타지 않았다. 국왕의 가마 뒤로는 국왕을 상징하는 용기(龍旗)가 나오는데, 규모가 커서 5명의 병졸이 함께 들었다. 다음에 51명으로 구성된 취주악대가 나타나는데, 이들은 행렬의 중앙부를 인도하는 악대로서 장용영에서 차출된 사람들이었다. 악대 뒤에는 훈련도감과 장용영의 초요기(招搖旗)가 있는데, 이는 군영의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깃발이었다. 정조가 왕릉을 행차할 때에 군사 훈련이 수시로 있었는데 초요기는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깃발이었다. 이번의 행차에서는 화성 서장대(西將臺)에서 거대한 군사훈련이 있었다.

행렬의 중앙부는 혜경궁 홍씨가 탄 가마이다. 먼저 혜경궁에게 제공할 음식을 실은 수라가자(水刺架子) 마차가 있고, 이를 감시하는 홍수영(洪守榮)은 공교롭게도 혜경궁의 친정 조카였다. 다음으로 혜경궁의 가마를 끌고 갈 예비 말 8필이 있고, 정조의 갑옷을 실은 2마리의 말이 있으며, 훈련도감 소속의 협련군(挾輦軍) 80인과 무예청 총수(銃手) 80인의 엄중한 호위 속에 혜경궁 가마(慈宮駕轎)가 나타난다. 혜경궁 가마의 측근에는 별감(別監) 6인이 호위하는데 이들은 모두 무예가 출중한 사람들이었다. 왕실의 주요 인물들을 호위했던 별감들은 대단한 위세를 부렸다.
정조가 실제로 탄 좌마(座馬)는 혜경궁의 가마 바로 뒤에 있다. 말을 호위하는 30명의 무예청 군사와 30명의 순라군에 둘러싸고 있으며, 측근에는 역시 별감 6인이 경호하고 있다.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행차였으므로 일부러 가마를 타지 않았으며, 말을 탄 국왕의 실체 형상은 그리지 않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오늘날 우리가 국왕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진(御眞) 즉 왕의 초상화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데, 정조의 어진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정조의 가마 다음에는 혜경궁의 두 딸이자 정조의 누이인 청연군주(淸衍君主)와 청선군주(淸璿君主)가 탄 쌍가마의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정조보다 2살, 4살 연하의 누이들로서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오빠와 함께 치르기 위해 이번 행렬에 동행했다. 그런데 이 행렬에는 시어머니의 회갑잔치에 당연히 있어야 할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효의왕후가 이 행사에 불참한 이유를 분명하게 밝혀주는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그 이유를 추정할 수는 있다. 당시 창덕궁에는 영조의 둘째 부인이자 정조의 할머니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살아있었다. 그런데 정순왕후는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정치세력과 관련되어 있었으므로, 사도세자의 무덤을 참배하고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거행하는 행사에 동행하기는 곤란했다. 따라서 정순왕후는 궁중에 남았고 손자며느리인 효의왕후가 함께 남아서 할머니를 모신 것으로 보인다.
이제 행렬은 중심부를 지나 후반부에 이른다. 먼저 장용영 소속의 고위 군관을 앞세운 장용위 군사 96인이 5열로 줄을 지어 따르고 있다. 여기에는 규장각신, 승정원 주서(注書), 예문관 한림(翰林) 등 문반 요직에 있는 관리들이 보이고, 오늘날 대통령 주치의라 할 수 있는 약물대령의관(藥物待令醫官)의 모습도 보인다. 그 뒤에 화려한 깃발 부대와 함께 장용대장(壯勇大將) 서유대(徐有大)가 장교 4인, 서리 2인, 아병 10인을 대동하고 행진하고 있다. 장용영은 1785년에 국왕의 호위를 전담하기 위해 만든 장용위(壯勇衛)에서 출발한 부대로 정조는 1793년(정조 17)에 이를 장용영이라는 독립 군영으로 발전시켰다. 장용영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구성되고, 내영(內營)은 도성의 방어를 담당하고 외영(外營)은 화성의 방어를 담당했는데, 특히 장용외영의 우두머리인 장용외사(壯勇外使)는 화성유수가 겸직했다.
장용영 군사 뒤로는 국왕의 비서실장인 도승지(都承旨) 이조원(李祖源)이 3인의 승지와 함께 가고, 그 뒤에는 규장각의 각리(閣吏)와 각신이 각 2인, 장용영 제조 이명식(李命植)이 경연관 2인을 대동하고 행진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용호영에서 차출된 가후금군(駕後禁軍) 50인이 따르고, 엄청난 크기의 표기(標旗)와 함께 각 군문에서 선발된 무사 9인이 따르며, 병조판서 심환지(沈煥之)가 장교를 대동하고 따른다. 마지막에는 다시 금군 25인이 5열을 이루고 따르며, 나팔, 호적, 북 소리와 함께 초군(哨軍)들이 따르면서 총 10리에 이르는 행렬의 대미를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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