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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어진을 그림 과정을 기록한 의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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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왕의 초상화, 어진
초상화란 특정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인물을 그려내는 그림으로서, 크게 보아 인물화의 일부로 볼 수 있다. 회화의 시작과 인물화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은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나타난 각종의 인물 그림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삼국시대의 초상화는 전체의 구도 속에서 인물이 구성요소가 된 성격이 짙다. 엄격한 의미에서 초상화라 할 수 있는 작품들은 대개 통일신라이후에 출현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왕의 어진을 비롯하여 승려들의 초상이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이르면 국왕, 승려와 함께 공신상(功臣像)과 여성상(女性像) 등이 널리 제작되었음이 각종 문헌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의 보급과 관련하여 서원이나 사당이 지역별로 늘어나면서 이곳에 봉안할 인물들의 초상이 다수 제작되었고, 조선후기에는 이러한 분위기가 보다 확산되어 명망있는 사대부라면 누구나가 자신의 초상화에 관심을 가지고 이름있는 화원을 동원하여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현재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초상화는 대부분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으로서 그만큼 초상화의 수요가 늘어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고위관직을 지낸 인물들의 초상을 모아놓은 『선현영정첩』이나 『진신화상첩』과 같은 화첩(자료사진:규장각 명품도록)들이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명망가들에 대한 초상화 제작의 활성화는 화원들의 기량 향상 뿐만아니라 화원들의 경제적, 신분적 지위 향상에도 기여했을 것이다.
* 초상화에 나타나는 곰보 자국
조선후기에 그려진 인물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재미있는 현상은 곰보 자국이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들이 어린 시절 마마를 앓았다는 증거이며, 당시 고관직을 지낸 사람들도 다수가 홍역을 앓은 것으로 보아 일반 백성들이 홍역으로 크게 곤역을 치루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영조에서 순조 연간에 활동한 관리들의 초상화를 모아 놓은 화상첩(畵像帖)인 『진신화상첩(縉紳畵像帖)』에는 관복(官服)을 입은 22명의 관리가 그려져 있다. 주로 영조 말년 이후 육조의 판서, 참판, 참의로 활동한 인물을 그렸는데, 『화상첩』에 그려진 인물 중 5명의 얼굴에는 곰보 자국이 선명히 나타나 있어서 당시 마마나 홍역이 상당히 유행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자료사진 : 진신화상첩 중 오재소-곰보자국 ) 이처럼 초상화를 그릴 때 곰보자국 하나하나까지 정밀하게 그려놓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당시의 사회상을 생생히 접해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는 왕과 왕후, 공신, 승려, 일반 사대부, 부부상 등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이들 초상화에 대한 칭호는 왕의 초상의 경우 어진(御眞) 또는 어용(御容)이라 하였으며, 그 외에는 초상(肖像),화상(畵像),영정(影幀),도상(圖像),진상(眞像),진영(眞影),유상(遺像)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사용되었다.
이들 호칭 중에서 '참 진(眞)'자가 특히 많이 사용된 것에서 터럭 하나, 곰보자국 하나라도 완전하게 표현하려 했던 우리 초상화의 성격을 읽어볼 수 있다. 무엇보다 초상화는 정확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또한 인물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 사람만의 특징이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여 화면에 담아야 했기 때문에 '정신을 옮긴다'는 뜻으로 '전신(傳神)'이라는 개념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전신이란 '전신사조(傳神寫照)'의 준말로서, 형상을 통해 정신을 전해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대상의 인격, 기질, 품성 등 내면에 있는 정신까지 그려낸다는 것이다. 인물에 따라 정신이 반영되는 곳이라면 안면 근육이나 광대뼈, 입, 뺨 등 어느 한 곳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국왕의 경우 그 얼굴 자체를 보는 것만으로도 경외의 대상이 되었을 터인데 그 성격과 정신까지 옮겨야 하니 어진 제작은 엄청난 공력이 들어가야만 하는 작업임에 틀림이 없었다. 이러한 초상화 제작의 분위기가 왕실에도 적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어진 관련 의궤이다. 국왕의 모습을 직접 그린 과정을 국가적 기록으로 남겨서 하나의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또한 초상화 제작에 관한 각종 문서나 화원들의 선발 과정, 소용 물품의 수량 등을 치밀하게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초상화를 제작할 때 그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예법에 맞게 초상화를 제작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2) 어진을 그린 사람들
의궤의 기록에 의하면 어진은 당대 최고의 화가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던 화가의 손에 의해 그려졌다. 그러나 아무리 강심장인 화가라도 최고의 권력자인 국왕 앞에서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그린다는 것은 정말 진땀이 흐르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가는 국가 기관인 도화서(圖畵署)에 소속된 공인 화가 즉 화원었다. 화원은 사대부 출신의 화가와 함께 조선시대 회화 발달을 이끌어나간 주축이었었다. 사대부 출신의 화가가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린데 비하여, 조선시대의 화원은 국가의 공식기구로 설치되어 있던 도화서에 소속되어 그림 그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행하였던 사람들을 지칭하였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그림을 그려서 직업으로 삼는 전문직 종사자인 셈이었다. 당시에는 도화서에 소속되어 있었던 사람이나 도화서에서 일한 적이 있는 사람을 모두 화원이라 불렀다.
조선시대에 화원들의 활동은 도화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대개는 국가에 필요한 실용적인 그림이나 기록화를 그리게 되었다. 화원들은 국왕의 초상이나 명망가들의 초상을 그리는 일도 있었으며, 지도를 제작하는 일도 국초부터 화원들의 몫이었다. 또한 기계류와 건축물의 설계도, 책의 삽화, 외교사절을 수행하면서 외국의 풍물을 그리는 일도 화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즉 화원들은 오늘날 주요 기록을 찍는 사진기자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대통령의 동정에 관련된 일은 전문 사진사가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최고의 사진작가나 촬영기사들이 맡는 역할을 조선시대에는 도화서의 화원이 수행했다고 보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어진을 제작하는 화원은 크게 주관화사(主管畵師)와 동참화사(同參畵師), 수종화원으로 구분되었다. 주관화사는 국왕 영정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인 얼굴을 맡은 화가를 말하며 동참화사와 수종화원은 주관화사를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어진 제작의 주관화사가 결정되면 영정을 도사(圖寫:생존한 국왕의 모습을 직접 그림)거나 모사(模寫:국왕 사후에 기존의 영정이나 자료를 토대로 그림)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작업에는 주관화사를 도와주는 1~2명의 동참화사와 3~4명의 수종화원이 함께 참여하였다. 동참화사는 주관화사는 옷과 같은 부분을 그리거나 색칠하는 일을 맡았으며, 수종화원은 그림 제작에 필요한 각종 업무를 지원하면서 영정 제작 작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어진 제작이 완성되면 화원들은 벼슬의 승급이나 말의 지급 등과 같은 포상을 받았다. 특히 어진 제작을 주관하는 만큼 주관화사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았으며, '어용화사'라는 영예가 주어졌다. 이들의 명망을 들은 쟁쟁한 사대부들은 이들에게 각종의 초상화를 주문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주관화사들의 신분적, 경제적 지위는 크게 상승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진 제작시에는 당시 도화서 화가 이외에도 전국에서 초상화에 뛰어난 선화자(善畵者)를 구하여 그 가운데서 화가를 선정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같은 연대기자료와 각종 의궤의 기록에는 화원이 선발되는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정조대에는 일차로 완성된 어진 초본(草本) 3점을 놓고 정조와 대신들, 그리고 어진 제작에 참여한 이명기, 김홍도 등의 화원들이 참여하여 어느 본이 가장 잘 그려졌는가에 대하여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는 장면이 보이는데, 이것은 어진을 제작할 때 여러 초본을 그리고 이것을 평가하여 가장 완성도가 높은 어진을 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처럼 어진 제작에는 당대의 내로라하는 화원들의 총력이 결집되는 양상을 띠고 있었다. 대개는 이미 실력이 검증된 도화서 화원이 발탁되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전국에서 수배된 일반 화가가 시험을 통하여 어진을 제작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하였다.
* 참고 자료: 국왕 초상화도 잘 그린 김홍도
김홍도는 대개 서민의 일상생활을 화폭에 담은 풍속화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인물, 산수, 선불(仙佛), 화조, 어해(魚蟹) 등 각 분야의 그림에서 천재적인 소질을 발휘했으며, 영조, 정조대에는 국가의 각종 기록화나 초상화 제작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의 김홍도 전기에 의하면, '영조 때 어진을 그리심에 김홍도가 그 부름을 받아 일을 맡았고 또 지금 임금(정조) 때에도 명을 받들어 어용을 모사하니 크게 뜻이 맞는다고 칭찬하시고 특별히 역말을 감독하는 임무(찰방)를 내려 주셨다'는 기록과 '영조 말년에 어진을 그리도록 명령하시어 당시에 전신(傳神:내면까지 표현하는 초상화)을 잘하는 이를 뽑는데 김홍도가 실로 선택을 받을만하였다. 일이 끝나자 공로에 따라 사포서(식품 공급을 맡은 관청) 별제를 제수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들 기록에서 김홍도가 영조와 정조의 어진 제작에도 참여하였다는 것과, 그 공로로 관직에 특별히 제수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조선후기 시대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하나같이 독특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인의 모습을 그토록 친근하게 화폭에 담았던 김홍도의 눈에 비친 국왕의 모습은 과연 어떠하였을가? 그 실물이 현재 전하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깝다.
3) 어진 제작 과정을 기록으로 보관하다.
조선시대에 어진을 그리는 일은 국가적 사업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특별히 도감을 설치하고 일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작업이 마무리 된 후에는 의궤를 편찬하였다. 『어용도사도감의궤』, 『영정모사도감의궤』가 바로 이러한 기록을 모아 놓은 의궤이다. '도사(圖寫)'라는 용어는 '직접 그린다'는 뜻으로, 왕이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직접 어진을 그린 것을 지칭하는 용어이고, '모사(模寫)'는 '어떤 그림을 본보기로 그와 똑같이 그린다'는 뜻으로, 훼손된 어진을 복구하거나 새롭게 봉안하기 위하여 본 그림을 바탕으로 다시 그리는 것을 말한다. 국왕이 사망한 후 후대에 여러 자료를 활용하여 생전의 모습과 가깝게 그린 경우도 '모사'라 불렀다.
영정을 그리는 일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계속 있어왔던 일이고 도화서의 화원이 그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양난을 거치면서 많은 전각들이 파손되었고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던 역대 국왕의 영정이 훼손되었기 때문에 보수를 하거나 옮겨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부분적인 보수만을 해오던 영정을 본격적으로 제작한 것은 조선후기 국가 질서가 재정비되기 시작한 숙종대부터였다.
어진 관련 의궤 중 현재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88년(숙종 14) 태조의 어진을 제작한 과정을 기록한 『(태조대왕)영정모사도감의궤』이다. 이것은 경기전에 모셔져 있다가 손상된 태조의 영정을 서울로 옮겨와 다시 그리는 작업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다. 1713년(숙종 39)에 제작된 『어용도사도감의궤』는 숙종의 어용을 그리는 일을 기록한 것이고, 영조대에는 『(세조대왕)영정모사도감의궤』와 『(숙종대왕)영정모사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이어 헌종대인 1837년(헌종 3)에 태조의 어진을 모사한 『영정모사도감의궤』가 제작되었고, 고종대에 태조의 어진을 모사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가 3차례 제작되었고(1872년, 1901년, 1902년), 1902년에는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睿眞)을 직접 그린 과정을 기록한 『어진도감의궤』가 제작되었다. 아홉 건의 의궤 중 일곱 건의 의궤가 기존의 어진을 바탕으로 모사한 '모사도감의궤'이고, 2건이 생존해 있던 국왕의 모습을 담은 '도사도감의궤'이다.
의궤의 제목 |
제작연대 |
주요 내용 |
소장처 |
1. 영정모사도감의궤 |
1688년(숙종 14) |
태조 어진 모사 |
규장각, 파리국립도서관 |
2. 어용도사도감의궤 |
1713년(숙종 39) |
숙종 어진 도사 |
규장각, 파리국립도서관 |
3. 영정모사도감의궤 |
1735년(영조 11) |
세조 어진 모사 |
규장각, 장서각, 파리국립도서관 |
4. 영정모사도감의궤 |
1748년(영조 24) |
숙종 어진 모사 |
규장각, 장서각 |
5. 영정모사도감의궤 |
1837년(헌종 3) |
태조 어진 모사 |
규장각, 파리국립도서관 |
6. 어진이모도감의궤 |
1872년(고종 9) |
태조, 원종 어진 모사 |
규장각, 장서각 |
7. 어진모사도감의궤 |
1900년(광무 4) |
태조 어진 모사 |
규장각, 장서각 |
8. 영정모사도감의궤 |
1901년(광무 5) |
태조 등 7조의 어진 모사 |
규장각, 파리국립도서관 |
9. 어진도사도감의궤 |
1902년(광무 6) |
고종의 어진, 황태자의 예진 도사 |
규장각, 장서각 |
이처럼 어진의 제작 과정을 직접 기록한 의궤가 9건이 존재하고, 의궤로 남아 있지는 않지만 역대에 국왕의 어진을 제작한 사례로 미루어 보아 어진은 조선시대에 상당수가 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에는 3종의 어진만이 전해져 오고 있다. 1872년(고종 9)에 옮겨 그린 태조의 전신상(전주 경기전 소장)과 1900년에 그려진 영조의 반신상(창덕궁 소장)과, 타다 남은 철종의 어진(창덕궁 소장)이 그것으로서 조선시대에 직접 제작된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의 어진 3종에 불과하다.
1934년에 편찬된 『선원전수개등록』에 의하면 당시까지 창덕궁에는 태조, 세조, 원종(인조의 부친),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순조의 아들),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의 어진이 봉안되었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 많던 어진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것은 6.25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했을 때 어진을 보관하고 있던 창고가 불탔기 때문이었다.결국 조선시대인들이 직접 만든 어진은 현대에 와서 거의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어진을 보관한 장소
조선시대에 국왕의 어진을 봉안했던 건물은 ‘진전(眞殿)’이라 칭해졌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의 어용만을 받드는 진전이 마련되고, 한편에서는 열성조의 어용을 받드는 진전을 설치하였다. 태조의 어진을 봉안했던 건물은 서울의 문소전(文昭殿)을 비롯하여, 개성 목청전(穆淸殿), 경주 집경전(集慶殿), 평양 영숭전(永崇殿), 전주 경기전(慶基殿), 영흥 준원전(濬源殿)이 있었다. 한편 경복궁내에는 서원전을 두어 열성조의 왕과 왕비의 영정을 함께 봉안하였다. 그러나 양란이후 조선전기의 진전들이 대부분 폐기되면서 진전 체제에도 변화가 생겼다. 1677년에 서울 남부의 훈도방에 남별전(南別殿: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을 지었으며(후에 영희전으로 개칭하였다), 강화도에 장녕전과 만녕전을 설치하여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봉안하였다. 숙종 사후에는 창덕궁에 새로이 열성 어진을 봉안하는 선원전을 설치하였다. 영조, 정조시대에는 어진도사 작업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기존의 진전 이외에 당(堂)이나 궁(宮)에 어진을 봉안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이에따라 육상궁, 경모궁, 현륭원,규장각 등에도 어진이 보관되었다. 조선이 멸망하였을 시기에는 열성조의 어진을 봉안한 선원전, 영희전을 비롯하여 태조의 진전인 준원전, 경기전, 목청전과 그밖에 소규모의 봉안처가 진전으로 남아 있었다.
어진 관련 의궤 중에서도 '도사도감의궤'는 국왕이 생존해 있을 때 그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보다 큰 의미가 있다. 현존하는 2건의 도사도감의궤 중 1713년 숙종 생존시에 그 모습을 직접 그린 과정을 기록한 『(숙종)어용도사도감의궤』에는 숙종의 초상화 제작 과정이 나타나 있지만, 어진에 관한 도설이나 반차도가 그려지지 않은 점이 아쉽다. 이책에는 4월 10일에 도감이 설치되어 5월 22일 참여인원들에 대한 포상까지 43일간의 행사기록이 실려있는데, 숙종의 어용은 2본이 제작되어 영희전과 강화도의 장령전에 각각 보관되었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
1902년에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을 그린 과정을 기록한 『어진도사도감의궤』는 어진도사도감의궤 중에서는 가장 발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숙종대의 의궤에 비해 내용이 훨씬 자세하고, 그림이 풍부하다. 황제와 황태자가 앉았던 용상(龍床)과 용교의(龍交椅)를 비롯하여 오봉병(五峰屛), 삽병(揷屛) 등과 왕실에서 사용한 각종의 도구들이 그림과 함께 크기와 길이가 표시되어 있으며, 완성된 어진을 봉안한 의식을 담은 「반차도」가 그려져 있어서 어진 제작의 정황을 보다 자세하게 접할 수 있다.
어진 제작은 어진을 그릴 것을 지시하는 국왕의 조칙(詔勅)14)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어 도감의 관원들이 모여 전반적인 내용을 논의하고 황제의 결재를 받은 각종 문서, 행사에 소요된 물품의 종류와 비용, 참여인원, 유공자 포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 초상화는 먼저 유지(油紙)에 그리고 채색을 한 다음 이를 비단에 옮겨 채색을 한 후 배접하고 장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의궤의 편찬 작업은 호위청 신영(新營)에서 이루어졌으며, 5건을 제작하여 규장각·시강원·장예원·강릉(오대산사고)·강화에 각각 보관하였다. 특별히 어람용으로 제작된 것은 규장각과 시강원에 보관하였음이 기록에 나타나 있다. 15)
※ 반차도를 통해 본 어진 가마 행렬
어진 제작과 관련하여 또하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어진을 제작하여 봉안하는 행렬의 반차도를 그린 것이다. 봉안 의식이 그만큼 중대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고종어진도사도감의궤』의 말미에는 제작된 고종의 어진과 황태자의 예진을 평양의 풍경궁(豊에慶宮)에 봉안하는 행렬의 모습을 그린 반차도가 26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반차도를 통해 행렬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행렬의 모습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반부에 황제의 어진을 담은 모습을, 후반부에 황태자의 예진을 담은 모습을 그리고 있다.
먼저 황제의 어진을 담은 행렬의 모습을 보면, 선두에는 도로차사원(道路差使員)이 나서고 이어 지방관과 관찰사가 말을 타고 뒤를 따른다. 이들 3명의 뒤로는 앞선에서 경호하는 전사대(前射隊) 병력이 따르고 전사대의 후미에는 이들을 지휘하는 위관(尉官)이 모습을 드러낸다. 위관의 뒤로 시종(侍從)과 주사(主事)에 이어 노란색 복장으로 향정(香亭)과 용정(龍亭)을 받든 사람들의 행렬이 보인다. 이들의 뒤로 금월부(金鉞斧), 황양산, 수정장(水晶杖) 등 의장물들과 함께, 운검(雲劒), 근장군사(近仗軍士)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근장군사 뒤로는 전악(典樂)의 지휘를 받는 전부고취(前部鼓吹)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요즘의 악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어진을 봉안한 가마가 나타난다. 어진을 담은 가마 앞에는 사금(司禁)과 별감(別監)이 중앙에, 그 좌우에는 개성대(開城隊)라는 병력이 호위한다. 가마는 노란색 옷을 입은 가마꾼 18명에 의해 운반되고 있다. 가마의 뒤로는 후부고취(後部鼓吹)가 뒤따르고 있다.
이어 황태자의 예진 봉안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전체적인 구성은 황제의 그것과 같다. 다만 향정과, 용정, 예진을 담은 가마가 붉은색으로 그려져 있어서 노란색으로 그려진 황제의 어진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란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색깔로 인식되고 있는데 의궤의 반차도 제작에도 이러한 의식이 반영되었던 것이다.
어진과 예진을 봉안하는 행렬의 반차도는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오늘날 비디오 카메라와 같은 기능을 한다. 이처럼 반차도를 남긴 것에서 어진 봉안의 행사를 국가의 중대사로 인식했던 당대인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부가적으로 전통시대의 의장과 복식, 호위 병력의 규모를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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