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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잔치의 이모저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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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궁중잔치의 이모저모

『순조기축진찬의궤』는 1829년 순조가 40세가 되는 동시에 재위 30년이 되는 해를 기념하기 위하여 잔치를 베푼 행사를 정리한 의궤이다. 본 행사는 1828년 11월에 세자가 예조판서 등과 더불어 국왕의 즉위 30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를 베풀 것을 논의하고 숙종대와 영조대의 전례를 찾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국왕은 순조였지만 1827년부터 세자인 익종이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으므로 행사의 실질적인 주관자는 세자가 된다.
1829년에 행해진 진찬 의식은 크게 대전외진찬(大殿外進饌)·대전내진찬(大殿內進饌)·대전야진찬(大殿夜進饌)·왕세자회작(王世子會酌)으로 구성되었다. 외진찬은 외연, 내진찬은 내연에 해당한다. 외연은 군신이 주축이 되는 연향으로 대비·왕비 등 여성이 참여하는 일이 없지만, 내연은 대비·왕비·세자빈·공주 등의 여성이 참여하는 잔치로서 왕을 비롯한 종친·의빈·척신 등 왕실의 친인척인 남성들이 참여하기도 하였다. 대전외진찬은 창경궁 명정전(明政殿)에서, 대전내진찬·대전야진찬·왕세자회작은 왕비의 거처인 자경전(慈慶殿)에서 거행되었다.
의궤의 내용을 항목별로 보면 권두의 「택일」은 행사의 주요 일정을 정리한 것이며, 「좌목」은 이 행사를 위해 특별히 설치된 기구인 진찬소와 의궤청의 구성원들의 실명을 기록한 것이다. 「도식」은 행사장의 인원과 그 위치를 표 형식으로 제시한 반차도와 행사장과 행사 장면을 담은 그림, 의식에 소요된 악기, 복식, 물품 등을 구체적으로 밝힌 그림으로 구성되었다. 반차도는 실제 행사에서 잘못을 범하지 않도록 미리 위치와 순서를 익히도록 한 것으로 도상연습에 해당한다. 각종의 그림에는 어좌를 비롯하여 악대, 여기 등 공연자들과 의장품, 참관자들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찾아볼 수 있다. 도식을 의궤에 기록된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정전진찬반차도(明政殿進饌班次圖)
자경전진찬반차도(慈慶殿進饌班次圖)
자경전야진찬반차도(慈慶殿夜進饌班次圖)
자경전익일회작반차도(慈慶殿翌日會酌班次圖)
명정전도(明政殿圖)
명정전진찬도(明政殿進饌圖)
자경전도(慈慶殿圖)
환취정도(環翠亭圖)
자경전진찬도(慈慶殿進饌圖)
자경전야진찬도(慈慶殿夜進饌圖)
자경전익일회작도(慈慶殿翌日會酌圖)
왕세자소차도(王世子小次圖)
외진찬정재도(外進饌呈才圖)
내진찬정재도(內進饌呈才圖)
채화도(綵花圖)
기용도(器用圖)
의장도(儀仗圖)
정재의장(呈才儀仗)
악기도(樂器圖)
복식도(服飾圖)
위에서 항목별로 의궤에 기록된 내용들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통하여 순조대에 베풀어진 궁중잔치의 전모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도식에 나타난 각종 그림들과 잔치상 하나하나 마다 놓여진 꽃에 대한 기록이나 각종 공연에 동원된 기생들의 복장까지 세밀히 기록한 것을 통하여 당시의 모습을 생생히 현장 복원할 수 있다. 이 의궤는 모두 6부를 제작하여 규장각, 춘추관, 예조, 태백산사고, 오대산사고, 적상산사고에 각각 보관되었다.
19세기는 흔히 세도정치기로 규정되어 왔다. 외척들의 발호에 따라 왕권이 약해지고 국왕은 허약하기만한 존재로 인식된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초반에 베풀어진 궁중잔치 의식의 면모를 세밀히 정리한 『진찬의궤』에는 당시 왕실문화의 멋과 화려함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것은 결국 18세기 영조·정조시대를 거치면서 성숙되어진 조선후기의 왕실문화가 순조대 이후에도 여전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즉 19세기초반까지도 궁중잔치 의식을 통하여 왕실의 위엄을 더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실의 의지가 지속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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