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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과 신하가 함께하는 활쏘기 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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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과 우리 민족의 인연은 고대국가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이 우리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동이(東夷)라는 말의 '이(夷)'자는 활 궁(弓)이 포함된 글자로서 '동쪽의 활 잘쏘는 민족'의 뜻을 내포하였다. 그만큼 우리 민족은 오래전에 주변국으로부터 활쏘기에 능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이 활쏘기에 뛰어났던 사실이나 고구려 벽화에 기마 자세를 하면서도 뒤돌아 활을 쏘는 무사들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뛰어난 활쏘기 솜씨는 쉽게 접할 수 있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중국의 창, 일본의 칼과 견줄 우수한 무기로 활을 들고 있는데 이 기록도 우리 민족과 활과의 불가분의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전통사회에서 활쏘기는 단순히 무예만을 시험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주례』에는 활쏘기(射)가 예(禮), 악(樂), 어(御), 서(書), 수(數) 등과 함께 육례(六禮)의 하나로 중시되었으며, 『논어』, 『맹자』, 『예기』 등의 유교경전에는 '사(射)'가 무엇보다 심신의 수양을 가져오는 행위로서 중시하였다. 또 활쏘기는 왕권의 강화나 국방강화를 위한 기본적인 덕목의 하나였으며, 이러한 취지에서 국왕이 문무관리들과 정기적으로 활쏘기를 하는 행사가 베풀어졌다. 국왕이 참석하여 신하들과 함께 하는 활쏘기 회동이 곧 대사례이며, 『대사례의궤』는 대사례의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1) 대사례 실시의 의미
대사례는 국왕과 신하가 회동하여 활쏘기 시합을 하면서 군신간의 예를 확인하는 행사로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에서 대사례가 시행되었던 것은 1477년(성종 8), 1502년(연산군 8), 1534년(중종 29), 1743(영조 19) 등 4차례로 확인된다. 그러나 대사례 외에 어사(御射) 시사(試射)가 빈번하게 실시되었고, 지방에서 실시되는 향사례(鄕射禮)도 매우 활성화되어 있었다. 조선사회에서 사례(射禮)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음은 기록화에서도 확인된다.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행차한 모습을 8폭의 병풍으로 담은 「수원능행도(水原陵幸圖)」 중에는 정조가 득중정(得中亭)에서 활쏘기 시범을 보인 모습을 담은 득중정 어사도(御射圖)가 남아 있어서 국가의 주요한 잔치에 활쏘기가 빠지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료:득중정어사도, 화성행궁)
성종대에 대사례를 실시한 이유는 무엇보다 왕권의 과시와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서였다. 대사례의 실시에 앞서 내린 하교에서 성종은 대사례의 전통이 말세가 된 이후 끊겼으나 국가가 여러해 동안 편안한 이때에 다시 대사례를 실시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면서 대사례를 실시하고자 하는 자신의 심정을 이해해 줄 것을 신하들에게 호소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성종대는 조선전기 정치제도가 정비되어 사회가 안정되어가던 때로 성종은 대사례의 실시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자신의 시대가 성세(盛世)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성종이 대사례가 갖는 군사적 의미를 강조하였던 것은 대사례가 실시되기 직전인 7월부터 변경지방의 방비문제가 계속 제기되는 등의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성종은 백성들과 성세의 기쁨을 함께 하기 위해 향사례와 향음주례도 실시할 것을 지시하고 있어, 대사례를 단지 왕실의 행사가 아닌 전 국민이 참여하는 국가적인 차원의 것으로 확대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종대 실시된 대사례는 대사례의 전형이 되어 이후에 시행되는 대사례도 그 기본성격은 성종대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중종은 즉위 후 여러차례 대사례를 실시하고자 하였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행하지 못하였다. 반정으로 즉위하고 기묘사화를 거쳤던 중종으로서는 민심수습책으로 대사례와 같은 국가적인 행사의 필요성을 느끼고, 결국 중종 29년 8월에 이르러서야 그 시행을 보게 되었다. 중종은 특히 기묘사화로 인한 부담감을 많이 지니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중종은 연산군대에 실시되었던 대사례가 군신의 연회로 끝났음을 잘못된 것으로 지적하면서 유생들에 대한 공궤(供饋:국왕이 음식을 내려줌)를 매우 강조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종대에는 6,229명의 유생들이 공궤를 받았다.
영조대의 대사례 실시는 왕권의 강화를 위한 국왕의 의도가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초부터 표방되었던 왕권강화를 위한 탕평책이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고, 특히 1740년(영조 16) 노론 4대신이 복관되면서 노론의 정치적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어 영조의 탕평정책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영조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이 200여 년만에 대사례를 다시 실시토록 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추정은 대사례의 실시에 적당한 때가 아니라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직접 예전의 규례를 살펴보면서 대사례를 시행토록 한 점이나, 원래 대사(大射)는 천자의 예이지만 제후에게도 대사례가 있었다는 이유로 그대로 '대사례'로 부르게 하였던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영조는 대사례가 시행되는 날 200년만에 조종의 구례를 회복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한편 자신의 나이가 50세가 되었을 때 이 행사가 열레게 되는 것을 매우 감격해 하였다. 또한 200년만에 맞는 대사례를 기념하기 위하여 각도의 관찰사 및 수령들에게 전국의 인재를 두루 뽑아 시상할 것을 거듭 명하였으며, 특별히 이 행사를 기록으로 남길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써 영조대에 실시한 대사례 모습은 기록과 그림으로 남겨져 현재의 우리들은 이 행사가 구체적으로 전개된 장면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
대사례가 갖는 왕권강화의 성격은 영조대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예를 들면 정조는 화성행차시에 득중정에서 직접 활쏘기 시범을 보였으며, 순조의 경우 대사례를 실시할 여유를 갖지는 못했지만 문무신들과의 각종 활쏘기 모임을 통하여 국정을 주도하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이 대사례는 조선사회에서 왕권강화라든가 민심수습 또는 군사적 필요 등에서 시행되었으며, 군신간의 화합을 도모하고 국정의 방향을 정하는 의미도 포함된 행사였다. 대사례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현장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대사례의궤』를 통하여 1743년 대사례가 열렸던 성균관으로 가 본다.
2) 「대사례의궤」의 주요 내용
『대사례의궤』는 1743년(영조 19) 윤 4월 7일 성균관에서 대사례를 행한 과정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대사례의궤』는 총 5건이 만들어졌다. 어람용 1책을 비롯하여 의정부, 사고, 예조, 그리고 대사례 실시 장소인 성균관에 1책이 보관되었다. 대사례가 성균관에서 열린 것은 국왕이 친히 성균관에서 행차하여 유생들을 격려하고 이들에게 심신의 수양을 쌓을 것을 권장하려는 취지에서였다. 조선시대에 성균관 유생들은 국가의 원기(元氣)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그만큼 국가에서 거는 기대도 컸다. 성균관 유생들이 전부 국가로부터 장학금과 각종의 물품을 무상으로 지급받았던 것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를 이곳에서 열었던 것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기대를 보여주고 있다. 대사례와 함께 왕세자 입학례와 같은 의식도 성균관에서 열렸는데 국왕이나 왕세자가 주인공이 되는 이러한 행사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은 틈림이 없다.

영조는 1743년 윤4월 7일 원유관과 강사포 차림으로 창덕궁 영화당(暎花堂)에서 소여(小輿)를 타고 집춘문을 통해 궁궐을 나왔다. 당시 국왕을 경호하던 병력의 배치 및 담당 임무, 도로 사정 등은 아래와 같은데 아래의 기록을 통하여 막강한 권력의 상징인 국왕 행차시의 경호 모습을 연상할 수 있다.
궁궐을 나온 영조는 창덕궁과 연결된 성균관의 하련대(下輦臺)에 이르러 가마를 내렸으며 임시 숙소인 악차(幄次)에 들어가서 제복(祭服)인 면복(冕服)으로 갈아입은 후 성균관 문묘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대사례를 행하기 전 선현들을 참배하는 의식을 행한 셈이다.
악차로 돌아온 영조는 익선관과 곤룡포19)차림으로 성균관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이곳에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과 유생들을 격려한 후 본 행사인 대사례 의식을 행하였다. 대사례를 마친 후에는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이고 포상하는 시사(試士)가 뒤따랐는데, 영조는 성균관 유생들을 격려하고 '희우관덕(喜雨觀德)'을 시제로 주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자 '희우'로 그 기쁨을 표시하고 유교 경전에 나오는 '관덕'이란 말을 시제로 삼은 것이다. 유교경전(예기)에는 '예로부터 활쏘기(射)는 덕을 보는 것(觀德)이며 덕은 그 마음에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가 활쏘기하는 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라 하여 활쏘기의 목적은 마음의 수양에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관덕'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다. 영조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활쏘기가 함축하고 있는 '관덕'을 시제로 하여 유생들에게 시험을 보인 것이다.
예로부터 활쏘기가 수양과 예의 회복에 비중을 두고 있었음은 다음의 자료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 사(射)는 진퇴와 주선이 예에 맞고, 안으로 뜻이 곧고 밖으로 몸이 바른 연후에 궁시를 심고하게 잡아야 한다. 궁시가 심고한 연후에야 적중시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이로써 덕행을 볼 수 있다.
(『예기』 제 46편 사의-射儀)
나. 어질다는 것은 활쏘는 것과 같다. 활쏘는 것은 자신을 바로잡은 후에 발하는 것이다
(『孟子』 공손추 상)
다. 사람의 행동을 살펴보는데 활쏘기보다 큰 것이 없다. 활쏘기를 반드시 학교에서 익히게 한 것은 그것으로 하여금 사람의 착함을 알아내고 선비의 재질을 가려 뽑아 교화 가운데서 함양되게 한 것이니 어찌 과녁 맞히기를 주로 하여 힘만 숭상할 뿐이겠는가' (『연산군일기』 8년 3월 2일)
이처럼 활쏘기는 에로부터 사람의 품성을 바로잡는 행동으로 인식되었다. 그럼 대사레는 영조에게 어떠한 의미로 담아왔을까? 탕평정치의 완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의 교화에 진력하던 군주 영조에게 있어서 대사례는 단순한 활쏘기 행사가 아니었다. 대사례를 통해 관리들의 정신자세와 기강을 확립하는 한편 국왕의 교화가 만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도록 하려는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함축되어 있는 바로 그러한 행사였다.
3) 도해에 나타난 대사례 절차
대사례의 구체적인 모습은 앞 부분에 그려진 세 장면의 그림을 통하여 현장의 모습과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세 장면의 그림은 왕이 활쏘는 모습을 그린 「어사도(御射圖), 신하들이 활쏘는 모습을 그린 「시사도(侍射圖)」,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과정을 그린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로서 시간적 순서에 따라 행사의 모습이 각각 4면에 걸쳐 그려져 있다. 각각의 그림을 보면서 대사례가 열렸던 현장 상황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① 어사례도(御射禮圖): (자료:대사례의궤 도설)
먼저 「어사례도」를 보면 악차(幄次)에는 세개의 단을 설치한 것이 보인다. 제 1단은 국왕의 자리, 2단은 순 자주빛의 용문석(龍文席)을 깔아놓은 어사위(御射位), 3단은 종친 및 문무백관의 자리였다. 단의 동쪽에는 3개의 탁자가 놓였다. 제 1탁에는 국왕의 깍지와 팔찌를 담고, 제 2탁에는 어궁(御弓)을, 제 3탁에는 어시(御矢)를 담았는데, 탁과 함은 모두 붉은 색이었다. 동서 계단 아래에는 탁자 2개를 두었다. 동쪽 탁자에는 상으로 줄 표리(表裏)와 궁시를 놓았으며, 서쪽 탁자에는 벌로 줄 단술과 잔을 놓았다. 하연대에 바닥을 높여 사단(射壇)을 만들고 90보 떨어진 곳에 과녁을 세운 다음 후단을 쌓았다. 임시로 설치한 어좌 앞으로는 문무의 관리들이 호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며, 악차는 차일과 휘장으로 사방을 막아 국왕을 엄호하였다.
뜰의 동서에는 홍살문을 설치하여 대사례 의식의 신성함과 위엄을 더하게 하였으며, 홍살문 앞에는 헌가(軒架:악대)20)를 두어 행사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홍살문 너머에는 과녁을 설치하였다. 어사에 사용된 과녁인 웅후(熊候)는 붉은 바탕에 곰의 머리를 표적으로 그리고, 붉은 대나무와 붉은 줄을 사용하여 후단 위에 설치하였다. 원래 천자의 과녁으로는 호랑이 모양을 그려넣은 '호후(虎候)'를, 제후의 과녁으로는 웅후를 사용하였는데, 당시는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왕의 과녁을 웅후로 삼은 것이다.
* 참고: 웅후의 크기와 재료
크기: 장 광 각 18 예기척(禮器尺)
모양: 홍칠포를 사용하고 백피를 가운데 대며, 3정(正)을 만든다.
재료: 마사(麻絲) 1냥, 회우피(灰牛皮): 장 광 각 6척, 당주홍(唐朱紅) 4냥, 진분(眞粉) 4냥, 하엽(荷葉) 4냥(畵 3正 소입), 당주홍 1전, 진분 5전, 소연목(小椽木) 4개, 숙마조(熟麻條) 30파(把), 생저(生苧) 2전, 오승포(五升布) 175척
과녁은 어좌에서 남쪽으로 90보(步) 거리에 설치하였으며, 웅후로부터 동·서 각 10보 되는 지점에는 핍(乏:화살가림)21)을 설치하고 핍 안에는 좌측에 7명, 우측에 6명의 획자(獲者)를 배치하였다. 웅후와 핍은 훈련원에서 규격에 맞게 설치하였다. 훈련원 정(正)은 북 앞에 섰으며, 훈련원 정 뒤에는 국왕이 쏜 화살을 처리하는 어사취시관(御射取矢官)이 배치되었다. 이외에도 그림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자줏빛 두건과 옷을 갖춘 위사(衛士) 30인의 핍 전후에 배치되어 국왕에 대해 엄중한 국왕 경호를 하였다.
② 시사례도(侍射禮圖) (자료:대사례의궤 도설)
「시사례도」는 시사자가 두명씩 짝을 지어 활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어사례도」와의 차이점은 과녁이 푸른색의 미후( 侯:사슴머리)로 바뀐 점이다. 핍 뒤에 서 있던 획자들은 화살이 꽂히면 해당하는 방위의 깃발을 들었는데, 중앙에 적중하면 적색, 상변에 맞히면 황색, 하변에 맞히면 흑색, 좌측에 맞히면 청색, 우측에 맞히면 백색의 깃발을 올렸다. 맞추지 못한 경우에는 채색의 깃발을 올렸다. 또한 동쪽 핍 앞에는 북을, 서쪽 핍 앞에는 금(金)을 두고, 화살이 적중하면 북을 치고 그렇지 못하면 금을 쳤다. 아래쪽에는 어사례 때와 마찬가지로 시사자들이 절을 할 때와 활을 쏠 때 필요한 음악을 연주하는 헌현(軒懸)들이 위치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시사자는 종2품 이상의 의빈과 종친 10명, 정1품 이하의 문신 10명, 정3품 이상의 무신 10명 등 총 30명이 참여하였다. 문신과 무신, 종친을 두루 망라한 셈이다. 이들 중 정3품 당상관 이상인 경우에는 사단 위에서, 정3품 당하관 이하인 경우에는 사단 아래에서 활쏘기를 했다. 직책에 따라 24명은 단상에서 6명은 단하에서 활을 쏘았는데, 『대사례의궤』에는 활을 잡은 손과 과녁에 맞힌 여부도 기록하고 있다. 전체 30명 중 왼손잡이가 12명(40%)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이채롭다. 이처럼 실명(實名)과 함께 적중 여부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평소에 활쏘기를 연마하라는 뜻도 담겨져 있었을 것이다.
③ 시사관상벌도(侍射官賞罰圖)
「시사관상벌도」는 시사를 마친후 시상하고 벌주는 주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병조정랑이 관직과 성명을 부르면 해당자는 국왕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상물(賞物) 중 표리(表裏)는 군기시(軍器寺)에서, 궁시(弓矢)는 제용감에서 각각 준비하였으며, 벌주는 내자시(內資寺)에서 준비하였다. 화살을 적중시킨 사람은 표리와 궁시를 상으로 받았으며, 맞히지 못한 사람은 벌주를 마셨다. 담당관원이 동쪽 계단에 이르러 국왕께 맞춘자의 관직과 성명을 크게 아뢰는데, 맞춘자들은 동쪽 계단 아래에서 서쪽을 향해 서고, 맞추지 못한 자들은 서쪽 계단에서 동쪽을 향하여 섰다. 풍악이 울리면 국왕께 사배한 후 시상을 받았다. 네발을 맞히면 표리(表裏)와 탑견(搭肩)을, 세발은 리(裏)와 탑견, 두발은 궁시와 진요(搢腰), 한발은 궁과 진요를 상으로 받았다.
한편 맞추지 못한 자는 벌주를 마셨다. 예관이 해(解)로 술을 떠서 굽혀 풍(豊)에 두면, 맞추지 못한 자가 풍에 나아가 북향하여 꿇고, 왼손으로는 부린 활을 잡고 오른손으로는 해를 잡고 서서 마셨다. 비록 맞추지 못했더라도 술을 마시는 작은 벌칙만 둠으로써 행사 자체를 축제의 분위기로 이끌어나가려는 배려가 엿보인다.
대부분의 의궤에는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장면을 반차도로 표시한데 비하여 『대사례의궤』에 그려진 그림들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행사의 모습을 모두가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모습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준천시사열무도(濬川試射閱武圖)」와도 유사하다 「준천시사열무도」는 영조대에 청계천 공사를 완성하고 유공자들을 치하한 모습을 담은 그림으로, 영조대에는 국왕 주도의 국가적 사업이 빈번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영조대부터 활성화 된 기록화의 흐름은 정조대에 꽃을 피우게 된다. 정조대에 화성 행차의 모습을 여덟폭의 병풍으로 담아 현장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기록화의 계승으로 볼 수 있다.
4) 대사례 이후의 행사
대사례는 활쏘기 행사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국왕의 활쏘기와 신하들의 시사(侍射)가 끝난 다음, 행사의 실무자인 인의(仁義)가 종친과 문무 백관을 인도하여 나가고, 무시관(武試官)이 과거 응시자들을 거느리고 들어와 배위(拜位)에 나아가 국왕에게 인사를 시켰다. 무과 응시자들은 세명씩 짝하여 쏘았는데, 김복규 등 60人이 뽑혔다. 이어 문시관(文試官)이 초고(初考)에서 합격한 약간명을 뽑아서 전시(殿試)에 참여시켰고 전시에서는 한광조 등 6人을 뽑았다. 『대사례의궤』의 기록에는 시관 및 유생들을 위하여 구급약을 준비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모습도 보이며, 문무급제자들의 관대(冠帶)와 기마(騎馬), 어사화(御賜花) 등의 준비를 지시한 내용들도 흥미를 끈다. 문무 합격자가 뽑히면 관례에 따라 방방(放榜)하는 것으로 행사는 마무리 되었으며, 영조는 연을 타고 돈화문을 거쳐 환궁하였다. 영조는 대사례가 끝난 후 병조판서와 동부승지에게 특별히 명하여 성균관에 물력옥자(物力屋子) 3칸을 만들어 행사에 사용된 제 용구들을 보관하게 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으로 하여금 대사례의 시행과정을 적은 『대사례기』를 찬진하여 성균관 명륜당에 걸어두도록 하였다. 행사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행사 기록이 영구히 보존되기를 바랐다. 영조의 이러한 바람은 결국 『대사례의궤』의 편찬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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