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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잔치의 멋과 화려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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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궁중잔치의 멋과 화려함 : 진연의궤, 진찬의궤, 진작의궤

의궤 중에는 궁중 잔치의 규모와 내용을 보여주는 의궤들이 있다. 『진연의궤(進宴儀軌)』, 『진찬의궤(進饌儀軌)』, 『진작의궤(進爵儀軌)』 등이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의궤들이다. 『진연의궤』는 조선시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며, 『진작의궤』는 왕이나 왕비, 왕대비 등에 대하여 작위를 높일 때 행한 의식을 기록한 것이다. 『진찬의궤』는 왕이나 왕비, 왕대비의 기념일을 맞이하여 음식물을 올린 의식을 기록한 의궤로서, 위에 설명한 의궤들은 왕실의 경사를 맞이하여 존호와 음식물을 올리면서 궁중에서 행한 잔치의 모습을 담고 있다. 명칭은 다르지만 궁중잔치의 멋과 화려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의궤라 할 수 있다. 이외에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사도세자의 묘소가 있는 수원 현륭원으로 행차한 상황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내용 중에도 회갑연을 베푼 모습이 나타나 있으며, 잔치의 절차를 서식으로 간단히 기록한 각종의 홀기(笏記)나 [회연도(會宴圖)]와 같이 독립된 그림을 통해서도 궁중 잔치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궁중잔치의 모습을 정리한 의궤에는 잔치에 올린 음식물을 비롯하여, 잔치에 필수적으로 따랐던 궁중음악과 궁중무용, 각 무용을 공연한 기생들의 복장과 명단을 비롯하여 왕실에 바쳐진 꽃 등 조선시대 궁중 의식의 면모를 보여주는 생생한 자료들이 무수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잔치 때의 참여자들의 위치를 미리 그려놓은 반차도와 궁중무용의 구체적인 모습, 연주된 악기와 복식, 그릇 및 상위에 올려진 꽃 등은 잔치 관련 의궤가 아니면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귀중한 자료들이다. 조선시대 왕실의 잔치 행사를 기록한 의궤를 통해 당시인 들의 축제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1) 궁중잔치는 언제 열렸을까?
조선시대에는 왕이나 왕비의 생일을 축하할 때, 세자의 탄생이나 왕세자의 책봉을 기념할 때, 외국사신을 영접할 때, 동짓날이나 정초 등 여러 궁중의식 때 화려하고 웅장하게 베풀어졌다. 이러한 잔치를 일컬어 ‘연향(宴享)’이라 하였고, 연향의 업무를 주관한 부서는 예조였다. 연향의 ‘연’은 ‘악(樂)’을 뜻하고 ‘향(享)’은 헌(獻), 즉 봉상(奉上)한다는 뜻으로,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풍악을 울려 신하나 빈객을 대접하는 행사를 의미하였다. 『경국대전』의 예전 ‘연향(宴享)’조에 의하면 매해 정례적으로 행하던 연향으로는 회례연(會禮宴:신하들을 위로하는 잔치)과 양로연(養老宴:80세 이상의 노인을 위한 잔치)을 비롯하여 단오나 추석과 같은 명절에 행하는 잔치, 행행(行幸:왕의 행차)·강무(講武)와 같은 국왕 주관의 특별 행사 뒤에 행하는 잔치, 충훈부·종친부·의빈부·충익부에서 베푸는 연향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조선시대 법전에 기록된 연향(宴享) 규정
1. 단오, 추석, 행행(行幸), 강무(講武) 후에는 의정부와 육조에서 잔치를 베푼다.(왕세자 및 왕세자빈의 生辰에도 같다)
2. 해마다 네 계절의 중간달에는 충훈부에서 잔치를 베푼다.(嫡長子孫도 또한 참석한다)
3. 매년 두 번 종친부와 의빈부에서 잔치를 베푼다.
4. 매년 한번 충익부(忠翊府)에서 잔치를 베푼다.
5. 매년 정조(正朝) 혹은 동지에 회례연(會禮宴)을 행한다.(왕세자 및 문무관이 모두 잔치에 참석한다. 왕비는 내전에서 잔치를 베풀며 왕세자빈 및 내·외명부가 모두 참석한다)
6. 매년 계추(季秋)에 양로연을 행한다.(대소인원의 나이 80이상인 자가 잔치에 참여한다. 부인들에게는 왕비가 내전에서 잔치를 베푼다. 지방에서는 수령들이 내·외청에 따로 자리를 마련하여 잔치를 행한다)
7. 관찰사·절도사·중국에 가거나 이웃나라에 가는 사신 및 진전원(進箋員:경사를 만나 진하하는 글을 올리는 관원)에게는 모두 왕이 예조에서 잔치를 베풀어 준다.
(진전원에게는 당하관이 접대한다)
궁중 연향은 크게 왕이 주인공이 되어 왕세자·문무백관을 초대하는 잔치 의식인 외연과 왕비·왕대비·대왕대비 등 여성이 주인공이 되어 왕세자빈과 내외명부(內外命婦)를 잔치에 초대하는 형식인 내연으로 구별되었고 두 행사는 각각 치러졌다. 남녀간의 내외를 위한 배려였으므로 외연과 내연은 행사장의 설비부터가 달랐으며, 행사진행자·무용수·악기 연주자 등에도 남녀의 차이를 두었다. 외연에서는 행사를 이끌어가는 집사와 차비(差備)들이 남자이고 정재도 무동이 담당하지만, 내연에서는 그 역할을 명부 중에서 차출된 여관(女官)과 여집사들이 맡고 음악 연주는 맹인 악사가 정재는 여령(女伶:여자 기생)이 공연하였다. 4)
궁중잔치에는 당악(중국에서 전래된 음악)과 향악(우리 고유의 음악)이 연주되었고, 정재(呈才)가 추어졌다. ‘정재’는 ‘재조(才操)를 드린다’는 뜻으로 국가의 경사, 궁중의 향연, 외국 국빈의 접대 때 공연된 궁중무용을 지칭한다. 연향이라 칭해진 궁중잔치는 왕이나 왕비를 비롯한 왕실에는 즐거움과 함께 왕실의 위엄과 권위를 선보이는 자리였으며, 악공·여기(女妓)·무동·가동 등 행사의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공연자들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궁중잔치의 면모는 조선초기에는 『악학궤범』에 정리되어 있고, 조선후기에는 의궤 제작이 활발해지면서 궁중잔치 의 면모가 의궤의 기록으로 정리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에서 진연·진작·진찬 등의 잔치가 베풀어지면 진연도감이 설치되고 행사가 발의되어 결정되는 과정, 치사(致詞)와 전문(箋文)의 시문, 연회 실행시 소요되는 각종 물목과 연회 참석자의 명단, 악사들과 각 도에서 차출된 기생들의 명단과 이들의 소임에 이르는 제반 사항을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를 작성하였다.
현재 소장되어 있는 진연에 관련된 의궤들을 보면 정조대를 기점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즉 숙종대와 영조대에 편찬된 의궤에는 반차도나 행사도와 같은 그림이 없고 행사와 관련하여 국왕에 올린 문서인 계사를 비롯하여 각 관청간에 업무 협조를 위해 주고받은 이문·내관·감결 등의 문서와 각 부서에서 맡은 업무를 기록한 일방·이방·삼방·별공작·내자시·내섬시·예빈시·사추서 등으로 항목이 구성되어 있다.
궁중잔치를 정리한 의궤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 계기는 1795년에 있었던 화성행차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이라는 왕실의 축제를 맞아 정조는 부친의 묘소인 현륭원을 참배하고 어머니의 회갑연을 성대하게 베풀었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이 행사의 전모를 기록하면서 잔치에 참여한 인원의 위치와 공연된 무용을 그림으로 상세히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그대로 계승되어 순조대 이후에 간행된 의궤에는 반차도나 행사도와 같은 그림이 예외없이 첨부되고 있다. 즉 앞부분에 [도식(圖式)]이란 항목아래 진연도(進宴圖)·정재도(呈才圖)·기용도(器用圖)·악기도(樂器圖)·복식도(服飾圖) 등을 그렸고, 이어 택일(擇日)·좌목(座目)·도식·전교·연설(筵說)·악장·치사·전문(箋文)·의주(儀註)·절목·계사·이문·품목(稟目)·감결(甘結)·찬품(饌品)·기용(器用)·수리(修理)·배설(排設)·의장(儀仗)·공령(工令)·악기풍물(樂器風物)·상전(賞典)·재용(財用) 등의 항목으로 잔치의 과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항목만으로도 궁중잔치에 상당한 공력이 들어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의궤에 기록된 기생의 실명(實名)
진찬의궤의 [공령(工令)]이라는 항목에는 각각의 궁중 무용이 공연될 때 이에 참여한 악공과 여령(女伶:기생)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한 예로 1829년의 진찬 의식에서 몽금척이 공연될 때 각 기생의 역할과 명단은 다음과 같은데 오늘날과도 유사한 기생들의 실명이 등장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봉죽간자(奉竹竿子): 영애(永愛), 춘외춘(春外春),
좌무(左舞): 선옥(仙玉), 진월(晉月), 금옥(金玉), 영애(永愛), 연심(蓮心), 임홍(任紅)
우무(右舞): 양대(陽臺), 운릉(雲綾), 홍강(紅降), 선옥(仙玉), 진향심(眞香心), 운영(雲英)
봉족자(奉簇子): 명선(明仙)
봉금척(奉金尺): 명옥(明玉)
봉황개(奉黃蓋): 순절(順節)
이처럼 왕실 최고의 의식인 진찬의궤에 신분적으로 천시된 기생의 명단까지 기록한 것은 이들에게 국가의 최고 행사에 직접 참여한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부여한 배려였다고 파악된다. 하급 신분의 백성에게까지 쏟는 세심한 배려가 의궤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다.
3) 궁중무용에는 어떤 것이 있었나?
조선시대는 궁중무용의 요람기이자 전성기라 할 수 있다. 이때에 창작 또는 발생된 궁중무용이 무려 36종에 달하는데 이것은 조선말까지 춤추어진 정재(呈才:정재는 재조(才操)를 올린다는 뜻으로 궁중에서 잔치 때 하는 춤과 노래를 의미한다)가 총 53종인 것을 보면 조선시대에 시작된 궁중무용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에 창제된 춤으로는 몽금척(夢金尺)·수보록(受寶錄)·근천정(覲天庭)·수명명(受明命)·하황은(賀皇恩)·하성명(賀聖明)·성택(聖澤)·곡파(曲破)와 같은 춤들이다. 이들 춤의 내용이나 부르는 가사들은 조선시대에 창작된 것으로서 사설 내용은 대개 선왕 또는 왕가의 융성을 그림 진연진찬진하병풍 中 신축진연도병7폭 여령정재 축원하고 왕업의 번영을 축하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궁중연회에서 연향의 첫머리에 등장한 무용은 <몽금척 夢金尺>이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에 신인(神人)으로부터 금척을 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세종 때 만들어진 몽금척을 처음 공연한 것은 건국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19세기 초반까지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 무용은 <처용무>로서 신라시대의 처용설화에 바탕을 둔 처용무는 나쁜 귀신을 쫓고 태평성대를 희구하는 바람을 내포하고 있었다. <처용무>는 왕실의 번영과 안정이 계속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19세기 전반까지 궁중연회에서 그 대미를 장식하였다.
조선시대 궁중무용의 규모에 큰 변화가 오는 것은 18세기이후이다. 조선전기까지 활발히 공연되었던 무용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의 전란을 거치면서 다소 규모가 작아졌으나 영조·정조시대 이후 문화 중흥이 이룩되면서 전대의 위용을 회복할 수 있었다. 순조대를 고비로 궁중무용은 정리되고 그 종목이 대폭 증대되어 50여종에 달하게 되었다. 특히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1809~1830)의 정치 참여는 궁중무용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무용에 관심이 컸던 익종이 대리청정을 하던 때에 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 8) 을 비롯한 20여종의 궁중무용이 새로 만들어졌다. 이때 창제된 정재는 춤의 외적인 요소보다 내적인 구성에 중점을 두고 춤다운 춤을 추구한 것이 특징이다.

즉 민족적 정서를 살린 고유한 예술성을 강조한 춤이 대량으로 창작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순조 연간에는 새 향악정재와 당악정재가 많이 창제됨으로써 조선전기의 화려했던 궁중잔치의 풍류를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는 <춘앵전 春鶯> 9)·<무고 舞鼓>10)·<가인전목단>·<장생보연지무 長生寶宴之舞> 11) 등의 정제는 순조 때 재연되었던 것을 국립국악원에서 재연되었던 것을 국립국악원에서 전승한 궁중무용들이다.
한편 1829년에 행해진 진찬의식 때 공연된 정재는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외진찬정재도에는 초무(初舞), 아박(牙拍), 향발(響), 무고(舞鼓), 광수무(廣袖舞), 소수무(小袖舞)가 그려져 있고, 내진찬정재도에는 몽금척(夢金尺),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 헌선도(獻仙桃), 무발(舞), 아박, 포구락(抛毬樂), 수연장(壽延長), 화황은(花皇恩), 무고, 연화무(蓮花舞), 검기무(劒器舞), 선유락(船遊樂), 오양선(五羊仙), 소수무, 춘앵전(春鶯), 보상무(寶相舞), 가인전목단, 처용무(處容舞)가 그려져 있어서 당시에 공연된 무용의 구체적인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처럼 순조대에는 궁중무용이 정비되었을 뿐만 아니라 궁중잔치의 의식이 체계적으로 정리, 기록되었다. 1829년에 편찬된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를 통해 궁중잔치의 면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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