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조가 화성을 건설한 까닭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도읍을 서울로 옮긴지 꼭 400년이 되는 1794년, 정조는 수도권의 남쪽 요충지인 수원에 화성(華城)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공사 기간이 2년여, 공사에 투입된 인원은 연 70여 만명, 공사비가 80만냥에 이르는 거대한 공사였다.
정조가 화성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한 1789년부터였다. 사도세자의 묘소는 원래 양주의 배봉산(拜峰山,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자리)에 영우원(永祐園)이란 이름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터가 좋지 않아 정조는 늘 마음이 편치 않다가 마침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는 화산(花山) 아래의 천하 명당으로 옮겼다. 그러나 현륭원이 조성된 자리는 원래 수원부의 읍치(邑治)가 있던 자리였으므로, 수원부를 지금의 화성으로 옮기고 장차 조선 최대의 행궁이 될 화성행궁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1793년에 정조는 수원이란 이름을 '화성(華城)'으로 고치고, 이곳에 유수부(留守府)를 설치했다. 유수부란 지방 도시에 중앙의 고관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한 것으로 오늘날의 직할시 개념에 해당한다. 조선시대에는 화성 이외에 개성(開城), 강화, 광주(廣州)에 유수부가 설치되었는데, 서울을 중심부에 두고 이들 4개 도시로 둘러싸인 지역은 바로 조선후기의 수도권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1794년의 화성 축성은 이를 뒤이어 나온 조치였다.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혜경궁 홍씨와 함께 60세가 되는 바로 그 해에 정조는 신도시 수원에 성곽과 행궁을 마련하는 공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화성 축성 공사는 집권 20년이 다되어 가는 정조의 안정된 왕권과 절정기에 이른 조선왕조의 문화적 역량을 총체적으로 과시하는 대역사가 되었다.
2)『화성성역의궤』의 편찬
『화성성역의궤』는 정조가 화성의 성곽을 축조한 뒤에 그 공사에 관한 일체의 내용을 기록한 의궤이다. 화성의 축조 공사는 1794년(정조 1) 1월에 시작하여 1796년 9월까지 계속되었다.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에는 공사 기간이 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실제로 공사가 끝난 것은 2년을 조금 넘는 정도였다. 화성의 성역 공사가 이처럼 일찍 끝날 수 있었던 것은 국왕 정조의 강력한 의지와 그를 돕는 관료들의 지혜가 결집되었고, 조선 왕조의 충실한 국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성성역의궤』는 공사가 끝난 1796년 9월부터 의궤를 편찬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국가의 주요 행사가 끝나면 이내 의궤청(儀軌廳)을 설치하고 의궤를 편찬했던 기왕의 관례를 따른 조치였다. 『화성성역의궤』는 일단 그 해 11월 9일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 완성된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체제가 맞지 않자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화성성역의궤』는 1800년 5월에 편찬이 끝나서 인쇄 작업에 들어갔으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중단되었고, 결국 1801년 9월에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화성성역의궤』는 『원행을묘정리의궤』와 마찬가지로 정리자로 인쇄했는데, 이는 정조와의 각별한 인연을 고려한 것이었다.
『화성성역의궤』는 80만냥이란 거금을 투입한 대공사의 종합 보고서였으므로, 다른 의궤에 비해 분량이 많은 편이다. 또한 조선왕조의 문예부흥기인 정조대, 그 중에서도 가장 전성기에 속하는 1790년대에 만들어진 책이므로 그 내용이 상세하고 치밀한 것이 특징이다. 『화성성역의궤』는 권수(卷首) 1권, 본문 6권, 부록 3권을 합하여 총 10권 9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수에는 『화성성역의궤』의 체제를 설명한 범례, 화성을 건설하고 의궤를 편찬하며 인쇄하는데 참여한 인원 명단, 그리고 도설(圖說) 즉 그림이 들어 있다. 여기에는 화성의 전체 모습을 그린 화성전도(華城全圖), 화성의 4대문, 비밀 통로인 암문(暗門), 횃불을 올려 신호를 주고받았던 봉돈(烽墩) 등 성벽에 설치된 모든 시설물들의 세부도가 그림으로 남아 있다. 또한 화성행궁, 사직단, 문선왕묘(文宣王廟, 공자의 위패를 모신 사당을 말함), 영화역(迎華驛) 등 화성 주변의 건물이나 시설의 그림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1975년에 정부에서 화성 성곽의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불과 3년만에 원형에 가깝게 복원할 수 있었던 것도 이 그림의 설명에 힘입은 바 컸다.
본문의 처음에는 화성 건설의 기본계획서라 할 수 있는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疇略)]이 있다. 이 글은 정약용(丁若鏞)이 작성한 안에다가 정조가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으로 성의 둘레, 높이, 재료, 성 주위의 도랑 등을 규정한 일종의 설계안이다. 그러나 실제 화성은 원안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어제성화주략]에서는 성의 둘레를 3,600보(步)로 규정했으나 실제는 4,600보로 늘어난 것이 한 예이다. 이처럼 화성의 둘레가 커진 것은 원래 성밖에 두는 것으로 계획했던 동문 주변의 민가(民家)들을 성안에 포함시키기 위해 성을 더 크게 지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본문에는 행사와 관련된 국왕의 명령과 대화 내용, 성을 쌓는데 참여한 관리와 장인들에게 준 상품, 각종 의식의 절차, 공사 기간 중 관련 기관 사이에 오간 공문서, 장인들의 명단, 소요 물품의 수량과 사용내역, 단가 등이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서 보이는 특징은 철저한 기록정신이다. 장인들의 명단에는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의 기술자 명단이 석수, 목수, 니장(泥匠, 흙을 바르는 기술자), 와옹장(瓦 匠, 기와나 벽돌을 만드는 기술자), 화공(畵工) 등 직종별로 정리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의 이름을 보면 최무응술(崔無應述), 안돌이(安乭伊), 유돌쇠(柳乭金) 등과 같이 하급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보이며, 이름 밑에는 근무한 일수를 하루의 반까지 계산하여 임금을 지급했다. 국가의 공식 기록에 천인들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특이하지만, 이들의 작업량을 세밀히 정리하여 일일이 품삯을 지급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부록에는 화성에 관계되는 각종 건축물의 규모와 위치, 그리고 각각에 소요된 경비를 상세히 정리했다. 또한 1795년에 정조가 화성에 행차한 행사와 정조가 지었던 글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원행을묘정리의궤』와 중복되는 부분으로 수정 과정에서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화성성역의궤』는 1965년에 수원문화재보전회에서 1책으로 영인하였고, 1994년에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 3책으로 영인 간행하였다. 또한 1978∼1979년에는 수원시에서 이를 번역한 『국역화성성역의궤』를 간행하여 오늘날 많은 연구자들이 이용하고 있다.
3) 화성행궁과 화성의 주요 건물들
화성의 도시 구조는 서쪽에 위치한 팔달산을 배경에 두고 성곽의 중심부에 화성행궁 건물이 동쪽을 바라보는 형세로 배치되었다. 화성행궁은 평소에는 화성유수가 사무를 보는 관청이지만 국왕이 행차할 경우에는 임시 궁궐로 이용했다. 행궁의 주요 건물에는 봉수당(奉壽堂, 48칸), 장락당(長樂堂, 25칸), 경룡관(景龍館, 10칸 반), 복내당(福內堂, 20칸 반), 유여택(維與宅, 50칸 반), 낙남헌(洛南軒, 13칸), 노래당(老來堂, 7칸), 득중정(得中亭, 20칸), 신풍루(新風樓, 8칸)가 있다.
봉수당은 행궁의 중심 건물로서 '장수를 기원한다'는 이름에서 보듯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거행한 건물이다. 여기에는 원래 정조가 친필로 쓴 '壯南軒' '華城行宮'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혜경궁 회갑잔치를 거행하면서 정조는 다시 '奉壽堂'이란 현판을 써서 걸었다. 낙남헌은 1795년에 수원과 인근의 유생을 모아 놓고 임시 과거를 보았던 곳이다. 낙남헌은 현재 신풍초등학교 담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정조대에 지어진 화성행궁 건물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다. 노래당은 '늙어서 오는 집'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정조가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여 와서 살려고 생각했던 건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약 5km에 이르는 화성의 성벽에는 다양한 시설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내루(內樓) 4__곳, 암문(暗門, 비밀 통로) 5곳, 수문(水門) 2곳, 적대(敵臺, 적의 동태를 살피는 곳) 4곳, 노대(弩臺, 석궁을 쏘는 곳) 2곳, 공심돈(空心墩, 적을 관찰하고 공격하는 곳) 3곳, 봉돈(烽墩, 봉화대) 1곳, 치성(雉城, 성벽의 일부를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공격하는 곳) 8곳, 포루(砲樓, 화포 공격을 하는 곳) 5곳, 포루( 樓, 군사대기소) 5곳, 장대(將臺, 군사지휘소) 2곳, 각루(角樓, 적군 감시와 휴식을 겸하는 곳) 4곳, 포사( 舍) 3곳이 모두 성벽에 있는 시설물이었다.
서장대(西將臺)는 팔달산 정상에 있는 군사지휘소로서 정조의 친필로 전해지는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곳에 오르면 화성과 그 외곽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1795년의 행차에서 정조는 이곳에서 군사 훈련을 총지휘하고 관람했다.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정자이면서 비상시엔 군사지휘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꽃을 찾고 버들을 쫓는다'는 이름을 가진 절벽 끝의 정자 건물, 그 아래에 조성된 반달 모양의 용연(龍淵), 연못 한 가운데의 작은 섬에 심어진 버드나무가 서로 어울리면서 화성에서 가장 멋진 경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방화수류정에서는 화성의 서장대, 장안문, 동장대는 물론이고 멀리 광교산과 관악산 자락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화성은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축성 방식에 중국에서 전해진 새로운 기술을 결합하여 만든 성곽이다. 이전에 만들어진 우리 나라의 성들은 흙바닥을 다지고 그 위에 돌을 쌓아서 만든 석성(石城)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성곽의 건축에 사용되는 돌은 주로 화강암이었다. 우리 나라의 화강암은 내구성이 크다는 장점이 있지만, 무게가 무거워 운반하는데 힘이 들고, 돌의 규격이 일정하지 않아 성을 쌓을 때에는 일일이 다듬어서 사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다.
화성에서는 벽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박지원, 박제가는 청의 발달된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한 학자인데, 이들이 청에서 도입하자는 문물 중에는 벽돌이 포함되어 있었다. 벽돌은 견고하여 오래 견딜 뿐만 아니라 규격이 일정하여 작업하기가 수월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따라서 화성의 4대문을 비롯한 주요 건축물은 벽돌을 사용하여 짓고, 성벽의 몸체는 종래와 같이 화강암을 사용하였다.
화성의 건설에는 또한 서양의 과학 기술을 활용하였다. 성곽 공사에는 많은 돌이 사용되므로 이를 효율적으로 운반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했다. 그 대표적인 기구가 거중기(擧重器)와 녹로이다.
거중기는 여러 개의 활륜(滑輪, 도르래)을 이용하여 무거운 물체를 적은 힘으로 들어올리도록 고안한 장치이다. 화성의 건설을 위해 처음 거중기를 만든 사람은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독일인(중국명 鄧玉函)의 『기기도설(器機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했는데, 이 책은 정조가 1776년에 청나라에서 구입해온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거중기는 서양에서 중국으로 전해진 과학 기술을 응용하여 만든 셈인데, 정약용은 상하 8개의 활륜을 사용하면 25배의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녹로 역시 활륜을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들고 내리는데 사용하는 기구이다. 다만 거중기에서는 여러 개의 활륜을 사용하지만 녹로에서는 활륜을 하나만 사용한다는 점이 달랐다. 녹로는 화성 건설에 사용된 이후에도 각종 공사에 많이 이용되었다. 창덕궁 인정전을 중건할 때나 국왕의 장례식에서 관을 땅속에 내릴 때 이용한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4)화성 복원의 밑바탕이 된 「화성성역의궤」
18세기 후반에 건설된 신도시 화성의 아름다움은 『화성성역의궤』에 수록되어 있는 [화성전도(華城全圖)]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화원 엄치욱(嚴致旭)이 그린 것인데, 화성의 성역에는 엄치욱 외에도 최봉수(崔鳳壽), 김필광(金弼光), 강치길(姜致吉), 지상달(池相達) 등의 화원과 승려들이 참여하여 그림을 그렸다. [화성전도]는 팔달산 기슭을 흐르는 수원천(柳川)을 중심으로 펼쳐진 도시의 전경을 비스듬히 내려다 본 모습으로 그리고, 성곽과 성안의 중요 시설물에는 그 이름을 써넣었다. 또한 팔달산 정상에는 서장대가 있고, 그 아래에 화성행궁이 있으며, 행궁 앞으로 장안문에서 팔달문 쪽으로 뻗은 대로변에는 이미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796년 8월 19일, 화성행궁에서는 화성의 완공을 축하하는 낙성식 잔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김홍도가 그린 16폭의 병풍이 놓여 있었는데, 이는 화성의 이름난 봄 경치와 가을 경치를 각각 8가지씩 골라서 그린 것이었다. 이른바 화성춘팔경(華城春八景) 화성추팔경(華城秋八景) 그림 병풍이었다. 이 그림의 대부분은 오늘날 사라져 버렸지만 그 일부로 생각되는 것이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전해진다. '화서문 밖의 가을 사냥(西城羽獵)'과 '미로한정의 국화 완상(閑亭品菊)' 2폭이 그것이다. 또한 『화성성역의궤』에는 사라진 그림들의 잔영이 남아있다. 꽃나무가 우거진 만석거의 풍경을 그린 [영화정도(迎華亭圖)]를 통해 우리는 '만석거의 황금 들판(石渠黃雲)'을 상상할 수 있고, 영화역 건물과 후면의 들판을 거니는 말의 모습을 그린 [영화역도(迎華驛圖)]를 보고 '영화역에 뛰노는 말(華郵散駒)'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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